"이러지 말아요!"
금릉은 휘몰아치는 격정에서 빠져나온다. 억센 동작으로 그를 떠민다. 남자의 뻔뻔스러운 짓이 까닭 모르게 그녀를 안도하게 했지만, 그것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막무가내로 들개처럼 몸을 섞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발 물러선, 불빛에 비친 남자의 눈은 고양이 눈과 같다.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갑자기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를까.
"기억나요?" 금릉은 애처롭게 그를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인다. "삼봉산(수도산)에 놀러 갔을 때 말이에요."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본다. 봄날이었어요. 우리가 앉은 바위 주위로 개나리나 목련이 향기를 뿜고 있었으니까. 오빠가 방각본 열녀춘향전을 펴고 내게 읽어주었던 거 기억하나요? 새로 부임한 사또가 27명의 기생을 하나씩 점고(點考)하는 대목이 있었잖아요. "비온 후의 동산, 명월이" 하고 부르면 기생 명월이 "점고 맞고 나가요" 대답하며 사또 앞에 부복했지요. 27명이나 되는 기생의 이름은 모두가 은유였어요. 오빠가 서책에 손가락을 끼우곤 말했어요. "명월(明月, 밝은 달)을 비가 온 후의 동쪽 산(東山)으로 비유했네. 특이해." 오빠는 놀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요. "밝은 달을 그냥 산이라 하지 않고 왜 비에 젖은 동쪽 산이라고 했을까?" 난 모르겠다고 했어요. 정말 알 수 없었어요. 난 그때 열한 살이었잖아요. "묻노라 술집이 어드메뇨, 목동이 아득히 먼 곳을 가리키네, 행화(살구꽃)." 난 그저 27명 기생들의 이름에 붙는 비유가 간드러져 깔깔 웃고 있는데, 오빠는 내 등에 팔을 두르면서 "슬프다 그지?" 음울하게 내뱉은 그때 당신 음성을 기억하나요?
기생이 되고 나서야 그 말을 이해했어요. 명월이 왜 젖은 동쪽 산이 되어야 하는 건지요. 그것은 정말 슬펐고, 그래서 당신이 자주 떠오르고는 했지요. 그 남자가 지금 그녀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남자는 들개처럼 파렴치할 뿐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어떤 격분에 싸여 그녀를 껴안으려고 한다.
금릉도 7년 만에 그를 만나자 슬픔, 회한, 후회가 격하게 밀려왔다.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와 몸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격정과 남자의 격정은 성질이 다르다고, 금릉은 생각한다.
곱사등이가 죽었다고요? 이제 당신도 잡혀 죽을지 모른다고요? 그것이 여자 몸을 탐할 이유가 되나요? 교활한 남자들은 항상 절박하다고 핑계를 대지요.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순수한 상태로 사랑할 수는 없나요?
왜 이리 까다로워. 기생 주제에. 이제 유곽에 나가 몸이나 팔 텐데. 그가 그렇게 생각할까. 금릉은 불현듯 두려워진다. 그가 떠나갈까 두렵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까다롭게 굴고 싶어요. 당신에게만요! 금릉은 그 방을 빠져나온다. 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삼봉산에서 책 읽었던 때가 기억나."
아침에 그 방에 들어가 보니 계승은 떠나고 없었다. 금릉은 새벽에 있었던 그와의 일이 꿈결 같다. 미명이 어슴푸레하게 스며들 때 다시 그의 방을 찾아갔던가.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계승도 깨어있었다. 긴 입맞춤, 남자의 눈빛, 뺨, 가슴, 그의 성기가 매화나무 가지 끝에 맺힌 순처럼 붉고 고왔다고 금릉은 되새긴다. 이른 아침부터 골목은 부산했다. 2월 하순에 접어들었지만 음력으로는 정월 이레다. 초하루가 지나고 첫 번째 서는 날이었다. 종이 장수, 포목 장수, 옹기 장수들이 골목을 지나갔고 계승은 그들 틈에 섞여 농루를 빠져나간 것 같았다.
오후가 되어서 금릉은 몇몇 기녀들과 함께 불이 난 곳으로 나가본다. 우현서루 앞을 지나 정거장 쪽으로 얼마 가자 이와세 상점이 사라지고, 검은 빈터만 남은 게 보인다. 반듯한 일식 지붕인 이와세 상점이 전소한 모양이다. 그 자리에 기둥 몇 개가 꽂혀 있고 드문드문 잡동사니들이 흩어져 있다. 마욱진의 지개 부대가 와서 화재 뒤처리를 하고 있다. 지게 부대가 40명이나 되니까 잿더미를 지게에 실어 걷어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을 듯하다. 오히려 이와세 상점 옆에 붙은 두 채의 가옥이 무너질 듯 서 있는 게 볼썽사나웠다. 그 두 채에도 불이 붙었다. 마욱진의 지개부대는 불에 반쯤 탄 건물을 철거하려고 여기저기 흩어진다.
얼마 전에 영천에서 화적에게 습격을 당한 마욱진은 인력거에 앉아 철거를 지시한다. 동문 앞 병원에서 보름가량 치료를 받고 나왔다는데 아직도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다.
"언니, 오돌매가 불을 질렀다는데 맞아?"
설루는 재가 날린다는 듯이 코를 싸안으며 묻는다.
"누가 그래?"
"저 순사가 내게 말해줬어."
이와세 상점 빈터에 일본 순사가 모여 있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아."
금릉이 설루를 나무라듯 빤히 눈을 뜬다. 이와세 상점이 불에 탔지만 한인들 가운데는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없을 거다. 성을 무너뜨려 유곽을 만들려는 이와세를 아무도 편들지 않는다.
"난봉쟁이들은 애가 타겠네. 유곽 설치가 늦어진다고 말이야."
설루가 까르르 웃는다.
설루의 말처럼 유곽 설치는 늦어질 거다. 유곽 사업을 주도하는 이와세가 자기 상점에 불이 났으니 한동안 정신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불을 지른 게 누군지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인들은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 것 같았다.
도시가 시끄러워진 것은 다시 이틀이 지나고서였다. 금릉이 백당지(白唐紙)를 사려고 큰시장으로 갈 때였다. 이즘 들어 기루에 손님들이 줄어들어, 앵무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서 기녀들이 골패 놀음을 하곤 했다. 장죽을 입에 물고 골패를 겨누며 차라리 유곽이나 얼른 세우지, 하는 자조 섞인 농담을 내뱉었다. 금릉은 손님이 없는 시간에 방에 앉아 대나무와 난을 쳤다. 색재에게 배운 운미난(芸楣蘭)이나 석파난(石坡蘭)에 빠져들었다. 그러다보니 종이가 남아나지 않았다.
금릉이 큰시장 길목인 달서교에 이르렀을 때 웬일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걸 보았다. 인구가 밀집한 계산성당까지 사람들이 길게 이어진다. 시장이 섰나? 아직 대시(약령시)가 열릴 때는 아니다. 달서교 밑을 흐르는 개천을 따라서 둑 위로 마치 흰 나무들이 우거진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큰장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뭔 일이에요?"
앞에 가는 아낙에게 묻는다. 아낙이 손사래를 친다.
"몰라. 사람들이 가잖아. 그냥 가보는 거지."
"구경거리가 있어요?"
간혹 서양 사람들이나 피아노와 종탑 같은 서양의 진귀한 물건들이 도착할 때가 있었다.
"저 앞에 상여가는 거 보여? 오늘 곱사등이 오돌매 장례야."
옆에서 사내 하나가 손을 뻗어 앞을 가리킨다. 멀리 닭시장에 상여 같은 게 보인다. 금릉은 깜짝 놀란다. 시장이 설 때의 활기와 다르게 사람들이 어딘가 흐느적거리며 걷는 것을 본다. 아직 쌀쌀한 데도 젖가슴을 내놓은 아낙들, 상투를 쓴 노인들, 새카맣게 때 전 옷을 꿴 사내애와 계집애들이 발을 끌면서, 달서교를 건너기 위해, 방천둑에서, 계산성당 앞에서, 읍성 서문에서, 골목에서 앞사람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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