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나는 아주 천천히 걸어 나무 아래로 갑니다. 아직은 덜 자라 무성하지 않은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불 때마다 햇살이 새어 듭니다. 이 나무도 언젠가는 세상을 견디고 이기며 넓은 그늘을 키울 테지요.
K병원 벤치에 앉아 있습니다. 나는 지금 아버지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아버지의 호흡이 가빠지신 건 불과 몇 달 전부터입니다. 나이를 먹어 그렇다는 말씀에, 나이를 먹어보지 않은 자식들은 그저 그러려니 했지요. 낯빛이 검어지고 얼굴이 붓는 것도, 걸음이 사뭇 더뎌지던 것도 그저 그러려니 했지요. 자식이 넷이나 되고 손주가 아홉인데도 아버지의 노년은 '그저 그러려니'로 여겨졌습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리나케 나가 보니 저 멀리 신작로를 걸어가는 아버지가 아지랑이 너머 아른거렸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던 아버지, 나는 털썩 주저앉아 목청껏 울고 말았지요. 울음소리를 들으신 아버지는 가던 길 멈추고 돌아오셔서 나를 달래셨습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를 따라 동경하고 갈망했던 도시 구경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화려한 불빛, 즐비했던 상점들…. 아버지는 처음으로 내게 화려한 도시문명과의 만남을 주선한 분이셨지요. 조잘대며 아버지를 따라나서던 내 보폭이 커지고, 나는 그때의 나만 한 자식을 키우느라 아버지와 적당히 어색해졌습니다. 아버지 걸음이 이상하리만큼 늦어졌을 때, 나는 내 뒤에서 걷던 아버지보다 내 손을 잡고 걷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더 썼던 것도 사실입니다.
주치의와 면담을 끝내고 충혈된 눈으로 돌아와 능청스러운 거짓말로 아버지의 상태를 둘러대던 나를, 아버지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자꾸 반기십니다. 나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창문 너머 느티나무만 바라봅니다. 아버지를 문병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석진 어디에서든 아버지가 생각나면 울었습니다. 목 놓아 울 수도 없는 슬픔이 심연 깊은 곳에서 맴돌아 숨이 막힙니다.
느티나무 그늘은 어제보다 더 두꺼워지고, 아버지의 그늘은 아직도 평온하여 자꾸 나른한 잠이 쏟아집니다. 때늦은 송홧가루가 날리고, 등나무 꽃향기와 아카시아 향기도 지천으로 흩어집니다. 신작로 걸어가시던 아버지 모습이 내 망막 속에서 오래오래 아른거립니다. 바람이 모질게 부는데 벌써 저만치 앞서가는 아버지의 오늘을 나는 따라갈 수가 없네요.
아, 아버지의 하루가 너무 빨라 큰일입니다.
박시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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