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소련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피 터지게 싸웠지만, 1922년과 1923년 두 차례의 군사협력 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까지 10년 동안 군사적으로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었다. 그 이유는 독일은 1차 대전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소련은 공산주의 혁명 때문에 모두 국제적 '왕따'였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의 처지가 처량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적국에 대한 공격은 물론 자위(自衛)까지 어렵게 꽁꽁 묶였기 때문이다. 군의 규모는 장교 4천 명을 포함해 10만 명으로 제한됐고, 육군은 종류를 불문하고 전차의 개발·보유가 금지됐으며, 공군은 항공기를 보유할 수 없어 서류상의 존재로 전락했다. 해군 역시 보유 함정의 총배수량은 10만t으로 묶였고, 잠수함은 보유할 수 없었다. 이런 제약 조건하에서 독일은 신무기 개발이나 새로운 전략·전술의 개발·훈련은 꿈도 못 꿨다.
이런 절망적 상황을 독일은 소련과 군사협력으로 헤쳐나갔다. 독일은 소련 장성들을 독일로 초청해 독일의 전략·전술 교리, 군사 경제와 병참 지원에 관한 '신사고'를 제공했다. 이에 앞서 소련은 독일에 무기 시험과 전술 훈련 장소를 제공했다. 모스크바 동남쪽에 있는 리페츠크에 공군 훈련장, 볼가강의 카잔에 탱크 학교, 톰카(현재 볼스크)에 화학전 훈련 단지를 세워 독일이 독일 땅에서는 어림도 없는 무기와 전술의 개발·시험·훈련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 군 당국이 육군 전차와 자주포 등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야외 훈련장으로 수송해 한미연합훈련을 실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미 본토 훈련장 시설을 활용해 주한 미군 순환 배치 부대와 훈련 효율성을 높이려는 것이라는 게 군 당국의 설명이다.
그러나 숨은 이유는 9·19 남북 군사합의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합의' 이후 최전방에서 포 사격 훈련을 하지 못하게 된 데 따른 궁여지책이란 것이다. 국방부는 이를 부인하지만 한미연합훈련의 규모가 크게 줄거나 중단돼온 사실을 감안하면 믿음이 가지 않는다. 1차 대전 후 독일군처럼 우리 땅에서 훈련도 하지 못하는 우리 군의 처지가 딱하다. 독일은 어쩔 수 없어 그랬다지만 우리는 '합의'라는 자승자박(自繩自縛) 때문이어서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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