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이 숭숭 뚫린 괴석과 함께 넓적한 화분에 담긴 수선화를 서양 정물화식으로 그린 수묵담채화이다. 수선화 잎이 앞면은 녹색, 뒤집어진 뒷면이 청색인 것은 고식(古式)의 채색법이다. 오른쪽 변에 바짝 붙여 길게 써 넣은 참신한 구성의 화제는 중국 북송 황정견의 시 '수선화(水仙花)'이다. 『고문진보』에 실려 널리 애송되었는데 첫 네 글자 '능파선자(凌波僊子)'가 특히 수선화의 대명사로 유명하다. '물결 위를 사뿐히 가는 선녀'로 수선화를 비유한 것은 위나라 조식이 낙수의 수신(水神)인 복비를 노래한 '낙신부(洛神賦)'의 표현을 이끌어 활용한 것이다.
수선화는 한자문화권의 문학사 뿐 아니라 지성사에도 의미가 깊다. 송나라 황실의 직계 후손인 조맹견은 그림에 솜씨가 있었는데 송죽매(松竹梅)를 그린 '세한삼우(歲寒三友)'와 '수선화권'이 그의 그림으로 전한다. 조맹견은 몽고족이 중국을 정복해 세운 원나라 조정에서 고관대작을 지낸 조맹부의 숙부이다. 어느 날 조카 조맹부가 찾아왔을 때 조맹견은 그를 뒷문으로 들어오게 했고, 가고나자 그가 앉았던 자리를 씻어냈다고 한다. '탁기좌(濯其座)' 이야기는 같은 황족이면서 조카와 달리 절개를 지킨 조맹견의 수선화그림에 고결한 정신미를 더했고, 수선화에 뚜렷한 문화적 의미를 더했다.
수선을 신선에 비유하고, 흰 꽃잎 위로 원통형 금색 꽃술이 예쁘게 솟아 있는 꽃송이를 금잔은대(金盞銀臺)로 부르며 찬미한 문장을 읽었지만, 한반도 내륙은 수선이 자라기에 기온이 낮아 글로만 접할 뿐 조선의 문사들은 수선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중국 사신 일행 중 몇몇이 알뿌리를 짐 속에 넣어와 서울에서 키우게 되면서 19세기 들면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수선화는 북경에서 들여오는 각별한 호사품으로 자리 잡게 된다. '추만 김우희향각 기수선화일본 기분 고려고기야(秋晩金友喜香閣寄水仙花一本其盆高麗古器也)', 곧 "늦가을 김정희가 향각에서 수선화 분재 한 포기를 보내 왔는데 그 화분은 고려의 옛 자기이다"는 정약용이 김정희에게 수선화를 선물 받고 지은 시의 제목이다. 제주로 유배된 김정희는 그런 수선화가 지천으로 피어 잡초 취급당하는 것을 보며 통탄했다.
김용준의 '수선'은 김정희의 수선화 사랑을 계승한 것이다.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해 서양화를 배운 김용준이 36세(1939년)의 나이에 동양화로 전향했을 때 모범으로 삼았던 작가는 김정희였다. 김용준은 김정희의 글씨를 찾아 표구사까지 뒤지며 그의 예술정신을 추체험했다. 당시 그가 처한 왜색(倭色)과 양풍(洋風)의 미술 환경 속에서 김정희는 민족미술의 한 등대였고, 김용준은 김정희가 가리키는 모든 길을 자신도 밟아보려 한 것이다. 김정희가 만년에 살았던 경기도 과천에 있는 추사박물관은 '추사가 사랑한 꽃'전을 작년에 열었다. 최애(最愛)는 물론 수선화.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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