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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중국] 인민을 위해 봉사하라?

옌롄커의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책 표지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뜻의 '爲人民服務'(웨이런민푸우)라는 구호는 중국에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중국의 모든 정부기관과 관공서 입구에 어김없이 붙어 있는 '웨이런민푸우'는 (중국공산당이) 중국 인민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상징물이다. 이 '웨이런민푸우'는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 가치다. 중국공산당의 존재 이유가 인민을 위한 복무에 있다는 주장의 근거이기도 하다.

실제로 '웨이런민푸우'는 중국공산당 당헌에 규정돼 있는 당원의 의무 사항이다. "중국공산당원은 반드시 전심전력을 다해서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개인 일체의 희생을 불사하고 공산주의의 실현을 위해 일생 분투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규정돼 있다. 우리 식으로는 공무원은 오로지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오사상(마오이즘)의 핵심으로 간주되는 웨이런민푸우는 신중국 건국 직전인 1944년 옌안(延安) 시절 한 마오의 연설에서 차용된 것이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장스더(張思德)라는 홍군 병사가 전투가 아니라 석탄을 캐러 나갔다가 탄광사고로 사망하자 마오 주석은 그의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추모하는 연설을 했다.

"인민의 이익을 위해 죽는다면 그것은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고 '파쇼'를 위해 죽거나 인민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를 위해 죽는다면 털끝보다 가벼운 죽음일 것이다. 장스더 동지는 인민의 이익을 위해 죽었으므로 그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다. 우리가 인민의 이익을 생각하고 대다수 인민의 고통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인민을 위해 죽는 것은 가치 있는 죽음이다."

요지는 석탄을 캐다가 죽었지만 그는 인민을 위해 죽었으므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마오의 '웨이런민푸우' 연설은 신중국 건국 이후 중국공산당의 당헌에 채택되면서 중국공산당의 복무지침으로 승격됐다. 마오 사후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 역시 '웨이런민푸우'를 폐기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한술 더 떠, 중국공산당 당헌은 물론 당장(黨章)에도 채택하고 각급 기관의 좌우명으로 삼도록 했다.

마오의 시대는 중국공산당이 인민을 위해 복무한 시대는 아니다. '대기근'과 문화대혁명 그리고 권력투쟁으로 점철됐던 마오의 30년은 절대로 인민이 행복한 시대가 아니었다. 그저 정치적 선전선동 구호였을 뿐이며 그 구호는 마오가 '인민을 사랑한 최고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도구였을 뿐이다.

마오의 주치의를 지낸 리즈수이는 "모든 것이 마오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고 자서전을 통해 털어놓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중국 대중소설가 옌롄커가 2005년 한 문예지에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하자, 중국 당국은 이 잡지에 대해 판매금지 조치를 내리고 전량 폐기 조치했다. '마오쩌둥 사상을 모욕했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 홍콩을 통해 이 소설을 구해서 읽는 열풍이 불었다.

소설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전개되는데 마오 사상으로 무장한 순진한 홍군 병사가 사단장의 전속 요리사로 배속된 후 사단장 부인이 '웨이런민푸우'는 나를 위해 복무하는 것이라며 유혹하는 것으로 마오 사상을 패러디한다.

소설가 옌롄커는 소설의 서문을 통해 "그 시대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영혼의 감옥이었지만 이런 감옥이 단지 중국인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권력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정치와 국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영혼의 감옥은 필연적으로 견고한 담장을 갖추게 된다"고 지적한다.

마오의 '웨이런민푸우'라는 영혼의 감옥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우리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은 달콤한 이름으로 다가왔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가슴 뜨거운 슬로건과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가슴에 와닿는 대통령의 취임사 역시 '인민을 위한 복무'보다 더 공허한 말장난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중국 마오쩌둥의 시대인지, 문화대혁명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인지 착각할 정도로 그 시대의 도구들이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문혁을 찬양하던 역사학자가 정치세력의 친위세력으로 등장한 데 이어. 홍위병보다 더 '무데뽀'격인 유시민 같은 대깨문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역사는 시대에 따라 발전하고 변화한다지만 홍위병의 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는 '팬덤정치'가 인민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활개치는 현상이 제발 '착시'였으면 좋겠다.

선거와 투표가 대중민주주의의 딜레마인지 여부는 이번 총선을 통해 확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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