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기억을 생각하다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지난 13일 종영된 MBC 드라마 '그 남자의 기억법'을 기억하는가. 시청률은 낮았지만 화제성이 높은 작품이었다. 남자 주인공인 앵커 김동욱(이정훈)은 1년 365일 8천760시간을 모조리 기억하는 과잉기억증후군이었고, 여자 주인공 문가영(여하진)은 열정 넘치는 라이징 스타였다. 남자는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해서 문제였고, 여자는 소중한 것을 기억하지 못해서 문제였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억해도, 기억을 잃어버려도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기억이 무엇이기에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기억은 주관적이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도 없다. 기억은 사람마다 다르고, 심지어 기억은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뇌과학자들은 기억을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현재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지는 정신적 구성물로 생각했다. 찰스 퍼니휴(Charles Fernyhough)는 "기억은 일어났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려는 힘과 자신의 믿음과 이미지에 일치하게 구성하려는 두 힘의 총합"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기억은 그 구성적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이 없다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인지 알 수 없다. 에릭 캔델(Eric Kandel)은 "우리가 우리 자신인 것은 단지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해온 것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 2권에서 해리는 기억이 정신적인 자산인 것처럼 기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 해리가 기억을 빼앗긴다면 더 이상 해리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 사유의 전통은 기억과 함께 존재했다. 서양철학의 인식 작용도 지식의 축적도 회상(recollection)과 재기억/아남네시스(anamnesis) 없인 불가능하다. 기독교 성서의 중심에도 기억이 있다. 기억은 히브리인들의 삶의 중심이었다. 하나님은 이집트 탈출 사건은 물론이고,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기억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들에게 기억은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을 현재화하는 행위였다. 기억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요, 하나님과 함께 미래(prolepsis)를 열어가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진정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오, 주님, 그러면 당신은 내 기억 안의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당신은 당신이 거처할 자리를 내 기억 안에다 만들어두심으로써 내 기억에 영광을 주셨으니, 이제 나는 당신이 내 기억의 어느 부분에 거처하시고 계신지 알아봐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심지어 그는 기억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장소라고 했다. 기억은 단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것들을 저장하거나 그것을 구성하는 능력이 아니다. 기억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온 온갖 잡동사니를 걸러내고 새롭게 하는 재창조의 자리이다. 기억은 반복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새롭게 해 참된 자신을 찾는 행위인 것이다.

요즘은 기억의 수난시대다. 기억은 단지 지식을 습득하는 도구가 되었고, 빠르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기능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기억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왜곡의 자리로까지 추락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0장, '기억의 신비'를 다시 떠올려 본다. "오, 나의 하나님, 이 기억의 힘은 위대합니다. 실로 그 힘이 너무 위대합니다. 그것은 너무 크고 끝이 없는 내면의 방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힘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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