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산책] 저물녘 - 이규보

이백 두보 시를 짓다 떠나간 뒤엔 李杜啁啾後(이두주추후)

이 우주가 온통 적막 속일세 乾坤寂寞中(건곤적막중)

강과 산은 저절로 한가해졌고 江山自閑暇(강산자한가)

조각달도 허공에 홀로 걸렸네 片月掛長空(편월괘장공)

*원제: 晩望(만망: 저물녘에 바라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국민 애송시 가운데 하나인 김춘수 시인의 '꽃'의 일부다. 보다시피 시인이 어떤 대상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대상은 비로소 꽃으로 다시 태어난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인식의 갱신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지은 시를 읽을 때마다 사물이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같은 연유로 중국문학사 전체를 대표하는 시인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이 세상 만물들을 소재로 하여 새로운 시를 지을 때마다, 만물들은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나느라고 시끌벅적 야단법석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들이 떠난 뒤에는 이 우주 전체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장마철 공동묘지 같은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왜 그럴까? 물론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시인들이 줄을 이었지만, 존재의 비밀을 확실하게 꿰뚫고 사물의 이름을 새로 지어 불러준 이백과 두보 같은 대시인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품의 후반부는 이백과 두보 같은 대시인이 사라진 뒤 적막하기 짝이 없는 세상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강과 산이 한가해졌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강과 산'은 이 세상 만물의 대명사다. 세상에 이백과 두보 같은 시인이 있다면 이 세상 만물들이 제 마음대로 한가할 수가 없었을 게다.

그들이 새로운 시를 지어낼 때마다 때로는 기뻐서 환호작약 손뼉을 치고, 때로는 슬퍼서 대성통곡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하도 기가 차서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겠지. 같은 맥락에서 조각달이 하늘에 혼자 걸려서 심심하도록 방치해 두지도 않았을 게다. 그러나 대시인들이 사라지자 강산은 그만 생기를 잃고 천근만근의 적막감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쨌다는 걸까? 이백과 두보의 뒤를 이어 자신이 이 세상 만물들을 다시 깨워내겠다는 고려의 문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이 시의 핵심일 게다. 만약 그렇다면 이 시를 짓던 날 밤에, 심심하여 하품하던 그믐달이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갈 새로운 시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이종문
이종문

이종문 시조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