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전쟁기, 대구는 문화 예술의 수도라고 불렸다. 많은 예술인들이 전쟁을 피해 대구로 내려왔고, 피난지인 대구에서도 예술을 꿈꾸고 문화를 꽃피웠다. 이들은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우정을 나누기도 했으며 전쟁 중에 만난 인연으로 평생의 친우가 되기도 했다.
최근 문화예술아카이브를 위해 수집한 자료에서 이 시기 청록파 시인들이 쓴 글을 잇달아 발견했다.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세 시인이 각각 대구의 화가, 무용가, 성악가와 교류하며 남긴 글이다. 암울한 전쟁 시기, 피난지에서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과 우정을 나누며 서로를 북돋우었던 글은 전쟁 중에도 꺼지지 않았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다.
청록파로 유명한 박두진 시인은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대구에서 변종하 화백과 만나 평생의 우정을 이어갔다. 이번에 둘의 인연을 찾아볼 수 있는 귀한 자료를 발견했다. 1953년 9월 대구 미국문화원(USIS) 화랑에서 열린 변종하의 첫 개인전 팸플릿이다. 팸플릿 표지 뒷면에 박두진이 글을 썼다. 변종하 작품에 대한 인상을 풀어놓은 글로, '변종하의 작품 세계는 동심을 탐구한 듯하며, 수도사와 같은 깨달음이 보인다.'고 적었다.
박두진이 1953년 대구 향촌동에서 펴낸 시집 <오도>의 표지는 변종하 화백의 그림이다. 박두진과 변종하는 대구에서 시작된 인연을 계속 이어갔고, 이후 1960,70년대 출판된 박 시인의 시집 표지도 모두 변종하의 작품이 장식했다. 1981년에는 두 사람의 시와 그림을 엮어 시화집 <해>를 펴냈다. 변종하는 대구 출신 한국 서양화단의 대표 작가로, 최근 대구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에 그의 작품이 포함돼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또 다른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은 대구 남성 무용가의 공연에 감명을 받아 글을 남겼다. 남성 1세대 현대무용가 김상규가 1953년 4월 대구 문화극장에서 연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 팸플릿에 글을 쓴 것이다. 조지훈은 6·25전쟁기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문총구국대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조지훈은 글에서 1951년 문총구국대에서 시작된 김상규와의 인연을 언급하며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해 '정진하는 인간상'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글은 '그의 예술이 한층 더 높은데 올라갈 것을 믿으며, 그가 스스로 개척하고 정진하도록 보살펴 줄 것을 강호의 동지에게 삼가 부탁한다'고 마무리된다. 김상규는 6·25 전쟁기 세 차례의 개인 발표회를 열었고, 조지훈 외에도 이효상과 구상 시인 등이 그의 무대를 지켜봤다는 기록이 있다.

청록파 시인 중 대구와 가장 오랜 인연이 있는 박목월 시인의 글도 이번에 새롭게 발굴되었다. 성악가 이점희가 세운 대구음악학원 제1회 발표회 팸플릿에서 박목월의 글이 실려있다. 경주 출생의 박목월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했고 모교 교사를 거쳐 한양대 교수가 되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대구 예술인들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특히 계성학교 동기생인 성악가 이점희와는 각별했다. 계성학교 졸업 후 이점희가 일본 중앙 음악학교로 유학을 갔던 시기, 박목월은 일본에 한동안 머물며 예술인들과 어울렸다. 해방 후 박목월이 먼저 계성중학교 국어 교사로 자리 잡았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점희를 같은 학교 음악 교사로 불렀다.
동기 동창이었고 모교 교사로 함께 일했으니, 박목월과 이점희는 서로의 예술 세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깊었을 것이다. 이점희가 1950년 시작한 대구음악학원이 어려움을 딛고 1954년 4월 11일 제1회 발표회를 열었을 때, 박목월은 격려의 글을 보내 팸플릿에 실었다. '보람의 탑을 세우라. 빗방울이 돌을 뚫듯 성의는 귀중하다. 성악가 이점희 씨의 놀라운 성의가 오늘의 성과를 거둠은 빗방울의 교훈을 다시 느끼게 한다. 가난한 오늘의 음악학원이 내일은 우리나라의 한결 큰 보람의 탑을 세울 음악의 전당이 되리라 믿는다.' 대구에서 음악가를 기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친구의 열정을 응원하는 내용이다.
1950년대 예술가들은 혼란하고 암울한 시대를 살았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6.25전쟁기의 혼란한 시기, 청년이던 그들은 피난지인 대구에서 서로를 북돋우며 연대했을 것이다. 그 시기 불안한 청춘들의 연대는 지금 한국 예술의 큰 획이 되었다.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은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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