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아날로그를 부탁해

박채현 동화작가

박채현 동화작가
박채현 동화작가

"한국은 미래의 나라 같아요."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은 입 모아 말한다. 편리한 대중교통, 어디서든 팡팡 터지는 와이파이에 놀라고, 남녀노소 한국인의 손에 들린 스마트 폰을 보며 입을 떡 벌린다.

한국에서는 30분 안에 은행 볼일을 보고, 우편물을 보내며, 맞춤 안경제작이 가능하다. 편리하고 정확한 디지털 기기 덕분이다. 게다가 기계는 지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기계는 사람이 선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하이패스 단말기로 계산하더니, 셀프 주유소가 늘어나고, 컴퓨터가 주문을 받고 로봇이 음식을 나르기도 한다. 이런 편리함이 오히려 불편한 사람들도 있다.

미래의 나라 같은 한국에서 노인으로 사는 건 녹록지 않다. 변화에 따르자니 너무 빠르고, 무시하자니 일상생활에 지장이 많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인들도 하나씩 배웠다. 스마트 폰 사용하기, 디지털 사진 찍기, 영상 편집하기 등등 여러 강좌에 등록하기도 했다. 자녀들과 카카오톡으로 문자를 주고받고, 손자와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잠시였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은 더 먼 디지털 세계로 달아났다. 은행 현금지급기 사용을 겨우 익히고 보니 스마트폰 앱에 접속해 은행 일을 보는 시대가 되었다. 각종 예약과 신청을 스마트 폰 앱을 통해서 하는 세상이 와 버렸다. 병원 진료 및 예방접종 예약이 그랬고, 정부에서 나누어주는 재난지원금을 신청하는 것이 그랬다.

스마트폰 앱으로 예약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다. 개인정보를 입력하고, 각종 질문에 '예', '아니오'를 정확하게 눌러야 한다. 기계는 한 치의 오차를 허용치 않는다. 손가락을 삐끗하거나 자칫 헷갈려서 다른 숫자를 누르는 순간 원점으로 돌아간다. 어른거리는 눈을 비벼가며 겨우 입력했더니 선착순에 밀렸단다. 기계는 노인이라고 봐주거나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일일이 젊은이의 손을 빌리자니 부끄럽고 미안하다.

한국이 디지털 강국이 되기까지, 눈물겨운 역사가 있다. 일제 식민지였던 나라, 전쟁으로 고아가 넘쳐나고 국토가 폐허였던 나라, 아프리카의 원조를 받을 만큼 가난했던 한국을 떠받친 사람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로지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거름이 된 사람들은 노쇠하고 어눌한 아날로그 세대로 불릴 뿐, 박수갈채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다.

아날로그 신호를 받아 숫자로 표현하는 게 디지털이다. 아날로그가 지나온 시간과 쌓아온 경험을 자료로 쓰면서도 디지털은 현재만을 나타낸다. 디지털의 신호체계를 우리도 좇고 있는 건 아닐까. 한 사람이 나고 자라 노인이 되기까지의 역사는 무시하고 현시점에서 효율성만 따져 노인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늙는다는 건 미안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노인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정책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속도 안에 배려를 녹여야 한다. 진정 특별한 디지털 세상을 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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