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2 매일신춘문예 희곡·시나리오 당선작] 집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시간 장마 끝 무렵 7월 중순 어느 월요일 오전 11시경

장소 서해안 고속도로 목감휴게소

등장인물

홍태주 (여, 17) : 교복 차림의 여학생. 캐리어가 있다.

백수장 (남, 30) : 양복 차림의 젊은 남자. 양복과 어울리지 않은 장화를 신고 있다.

안다정 (여, 30) : 원피스를 입고 남자 구두를 신고 있다. 수장과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다.

[2022 매일신춘문예 희곡·시나리오 당선작] 집으로 가는 길. 일러스트 전숙경
[2022 매일신춘문예 희곡·시나리오 당선작] 집으로 가는 길. 일러스트 전숙경

사람이 없는 한적한 휴게소 앞. 비가 막 그쳤는지 휴게소 앞에 있는 탁자의 의자는 젖어있다. 휴게소 근처에 있는 야구 연습장에서는 야구공 치는 소리가 들린다. 때론 세게, 때론 약하게…….

휴게소 건물 옆 나무 의자가 있는 곳에 교복 차림의 태주가 있다. 맨발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다. 태주는 의자에 앉으려다가 의자가 물에 젖은 것을 보고 돌아선다. 태주는 헤드셋으로 노래를 들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캐리어를 끌고 의자 바로 옆 흡연구역 가까이 간다. 태주는 가방에서 담배를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고 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태주가 핸드폰 화면을 보자마자 종료음이 울리면서 전원이 꺼진다.

태주: (꺼진 핸드폰 화면을 보며) 에이씨…….

그때 태주의 등 뒤로 수장이 보인다. 수장, 흡연구역으로 온다. 수장은 양복과 어울리지 않게 장화를 신고 있고, 여자 구두를 들고 있다. 수장은 흡연구역으로 와 태주 옆에 선다. 구두를 내려놓고 손에 있는 물기를 바지에 대충 닦아낸다. 수장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옆에 있던 태주는 이상한 눈으로 수장을 쳐다본다. 수장 역시 태주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인지하고, 불편한 듯 고개를 돌린다.

수장은 담배를 피우며 휴게소 건물 쪽을 여러 번 쳐다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태주의 헤드셋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수장: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태주, 수장을 위아래로 쳐다보다가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가방에서 담배를 다시 꺼낸다. 수장은 그런 태주를 기가 막힌다는 듯 본다.

수장: 하.

태주는 헤드셋을 내리고 수장에게 다가간다.

태주: 다 들리거든요.

수장: 네?

태주: 다 들린다고요. 라이터가 없어서 그런데, 좀 빌려주세요.

수장: 뭐라고?

태주: 왜 갑자기 반말해요?

수장: 너도 해.

태주: 라이터.

수장: 하. 너 지금 무슨…… (태주 옆에 있는 캐리어를 보고) 가출?

태주: 아니거든요.

수장: 아니긴.

태주: 무슨 상관이에요.

수장: 집 나오면 고생한다.

태주: (수장을 위아래로 본다) 그래 보여요.

수장: 뭐?

태주: 아저씨 지금.

수장: 난 집 나온 거 아니거든.

태주: 그럼요?

수장: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수장,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태주에게 건넨다. 두 사람, 담배를 피운다.

태주: 무슨 사정인데요?

수장: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지?

태주: 까칠하시네. 아저씨 장화는 왜 신었어요? 장화랑 어울리는 옷은 아닌데.

수장: 얘기하면 길다. 넌 왜 맨발이야?

태주: 저도 얘기하면 길어요.

수장: 까칠하시네.

태주: 아저씨가 누군 줄 알고 말해요.

수장: 불 빌려놓고선. 너 그거 갚아라.

태주: 어떻게 갚아요?

수장: 지금부터 방법을 생각해 봐. 잘.

태주: 아저씨…….

두 사람, 조금 긴 정적. 태주는 미심쩍은 듯 수장을 바라보고, 수장은 그런 태주를 멀뚱멀뚱 본다.

태주: 이상한 사람이죠?

수장: 뭐라는 거야.

태주: 하긴. 이상한 사람이 응 나 이상한 사람이야 하진 않겠지.

수장: 아니거든. 이상한 사람.

태주: 여긴 언제까지 있을 건데요?

수장: 모르겠다. 왜? 여기 있음 진짜 갚으려고?

태주: 그럼 핸드폰 좀 빌려주세요.

수장: 핸드폰은 왜?

태주: 배터리가 다 떨어졌어요.

태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수장에게 보여준다.

수장: 없어.

태주: 핸드폰이요?

수장: 응.

태주: 거짓말.

수장: 진짜야.

태주: 요즘 대한민국에 핸드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수장: 여기.

태주: 빌려주기 싫으면 그냥 빌려주기 싫다고 해요.

수장: 아, 진짜라니까. 넌 왜 사람 말을 안 믿냐?

태주: 전 원래 사람 안 믿어요.

그때, 다정이 다가온다. 다정은 원피스를 차림에 남자 구두를 신고 있다. 구두는 진흙이 묻어 조금 지저분하다. 다정은 많이 지쳐 보인다. 수장, 다정이 오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본다. 태주, 담배를 끄고 다가오는 다정을 못 본 척하고 헤드셋을 쓴다.

다정: 왜 여기 있어?

수장: 담배.

다정: 핸드폰은?

수장: 차에.

다정: 돼?

수장: 아니. 먹통이야.

다정: 충전은 해 봤어?

수장: 배터리 문제가 아니야.

다정: 그럼 어떡해?

수장: (하늘을 본다) 곧 비 또 떨어지겠다.

다정: 어떡하냐고.

수장: 뭘 어떡해.

다정: 아버님한테 연락드려야지.

수장: 안 해도 돼. 어차피 안 기다려.

다정: 야.

수장: 서울 가서 해.

다정: (주위를 본다) 공중전화 없나?

수장: 가 있어. 금방 갈게. 눈 좀 붙이고 있어.

다정: 전화 드려. 출발하기 전에.

수장: 아, 알았어.

다정, 신고 있는 구두가 커서 불편한 듯 뒤뚱거리며 걷는다. 수장은 다정이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본다. 태주, 헤드셋을 다시 내린다.

태주: 거짓말 아니네요.

수장: 말했잖아.

태주: 저 아줌마가 아저씨 사정이에요?

수장: 뭐, 비슷해.

태주: 무슨 사정인데요?

수장: 말해도 모른다, 넌.

태주: 되게 예쁘다.

수장: 예쁘긴.

태주: 이 캐리어 같은 건가?

태주, 옆에 있던 캐리어를 발로 툭 친다. 수장, 담배를 끈다.

수장: 너 보기보다 똑똑하구나.

태주: 아줌마 신발은 왜 그래요? 아까 아줌마가 아저씨 신발 신고 있는 것 같던데.

수장: 아, 맞다. 구두.

수장, 옆에 있던 다정의 구두를 들지만, 다정은 이미 가고 보이지 않는다.

태주: 신발도 어쩌다 보니?

수장: 굴렀어. 뻘밭에서.

태주: 싸웠어요?

수장: 되겠냐, 싸움이.

태주: 미안하다고 해요.

수장: 뭘 미안하다고 해.

태주: 먼저 미안하다고 해요.

수장: 내가 왜.

태주: 화난 것 같던데.

수장: (어이없다) 그럼 나는?

태주: 아저씨 왜요?

수장: 아니다. 됐다.

태주: 아저씨 핸드폰은 왜 안 돼요?

수장: 몰라.

태주: 뻘밭에서 굴러서?

수장: 뭐, 비슷해.

태주: 저…… 아저씨.

수장: 또 왜.

태주: 저 돈 좀 빌려주세요.

수장: 뭘 빌려줘?

태주: 돈이요.

수장: 빌려줘?

태주: 갚을게요. 진짜로. 서울 가서.

수장: 갚아야 할 게 늘면 안 좋다, 너.

태주: 고작 라이터 한 번 빌려줬으면서.

수장: 뭐?

태주: 맞잖아요. 돈은 아직 안 빌려줬잖아요. 핸드폰도 안 빌려줬고.

수장: 내가 널 뭘 믿고? 나도 사람 안 믿어.

태주: 에이씨.

수장: 에이씨? 그래. 그럼 너가 지금 왜 여기 있는지 말해주면 빌려줄게.

태주: 그걸 제가 왜 말해요.

수장: 돈 빌려줄 사람 입장에서 그 정도 알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태주: 됐어요, 그럼.

수장: 그래. 학생이 됐다면 그 입장 존중하지.

태주: 에이씨. 그리고 저 학생 아니거든요!

수장: 자꾸 에이씨 에이씨 할래?

태주: 좀 빌려줘요! 진짜 갚는다고요!

수장: 서울 가면 돈이 생기냐?

태주: 네.

수장: 무슨 수로?

태주: 알바 할 거거든요.

수장: 너 근데 몇 살이냐?

태주: 왜요?

수장: 그니까.

태주: 열일곱이요.

수장: 학교는?

태주: 안 다녀요.

수장: 교복은 뭐야?

태주: 교복 입으면 다 학교 다니는 거예요?

수장: 교복 입은 사람 보고 학교 다닌다고 생각하는 거랑 교복 입고도 학교 안 다니는 거랑 둘 중 뭐가 더 이상하냐?

태주: ……돈 좀 빌려주세요.

수장: 하. 그래서 얼마면 됩니까?

태주: 돈은 있어요? 현금 말이에요.

수장: 너보단 있겠지?

태주: 음…… 이십만 원? 삼십만 원?

수장: 얼마 빌려야 할지도 모르고 돈을 빌려달라고 해?

태주: 아니, 알아요.

수장: 너 당장 너한테 얼마가 필요한지도 모르지?

태주: 아, 안다니까요.

수장: 그니까 그게 얼만데?

태주, 대답을 못 한다. 수장은 태주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뒤에 있는 의자로 간다. 수장, 의자 위에 물기를 자신의 옷으로 닦아낸다.

수장: 앉아.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인데 너가 지금 왜 여기 있는지 말할 때까지 기다려줄게.

태주: 왜요?

수장: 알아야겠어, 내가.

태주는 앉지 않고 서 있다.

수장: 앉으라니까.

태주: 아저씨 왜 자꾸 어른인 척해요?

수장: 뭐인 척해?

태주: 지금 그렇잖아요. 재수 없게.

수장: 재수 없어? 재밌다, 너.

태주: 놀리지 마세요.

수장: 어른인 척하는 게 뭔데?

태주: 알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알고 싶은 척하는 거요.

수장: 난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어른인 척하려는 것도 아니야. 근데 너가 여기 왜 있는지 알고 싶은 건 맞아. 그냥 쉬려고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집 나온 거야?

태주, 망설이다가 주춤주춤 수장 옆으로 가 앉는다. 짧은 정적이 흐른다.

태주: 네. 근데 아저씨부터 말해줘요.여기 왜 있는지.

수장: 하……. 그래. 난, 아까 본 너가 예쁘다는 여자랑 결혼을 하기로 했어.

태주: 엥? 진짜요?

수장: 야. 뭐냐, 그 반응.

태주: 아줌마 예쁘잖아요.

수장: 근데?

태주: 아저씨는 영…….

수장: 뭐. 나 인기 많아.

태주: 아무튼 그래서요?

수장: 그래서 예전에 살던 집 사람들한테 소개해 주려고 가는 길이었는데 취소했어. 그런데 차도 갑자기 맛이 가고, 핸드폰도 맛이 갔어.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거야. 됐지?

태주: 예전에 살던 집이요?

수장: 어릴 때 살던 집.

태주: 보통 그렇게 말하나?

수장: 보통 그렇게 안 말하지.

태주: 근데 왜 취소했어요?

수장: 아버지란 인간이 결혼한단다.

태주: 아저씨네 아빠가 결혼을 해요?

수장: 어.

태주: 그런데 왜 안 가요?

수장: 그 인간 또 결혼하면 나 안 보기로 했거든.

태주: 아…….

수장: 자, 됐지? 이제 너 차례.

태주: 질문이 뭐였죠?

수장: 어이, 학생.

태주: 학생 아니라니까요! 집 나오는 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그냥 싫어서지!

수장: 그럼 학생은 왜 아니야? 학교를 그만뒀어? 아님 그만둘 거야?

태주: 그만둘 거예요.

수장: 왜.

태주: 다닐 필요 없으니까요.

수장: 왜.

태주: 다니기 싫어요. 재미없어요.

수장: 학교는 재미를 위해 다니는 데가 아니야.

태주: 다른 애들은 재미있어서 다녀요.

수장: 누가 그래? 걔들이 그렇게 말해?

태주: 아니요.

수장: 봐. 다니다 보면 재미있어지는 거지.

태주: 아니던데요.

수장: 너 왕따구나?

태주: 아니거든요!

수장: 아니긴. 왜 발끈해?

태주: 아니라고요!

수장: 그럼 신발은? 어디 있어? 왜 맨발이야?

태주: 잃어버렸어요.

수장: 어디서?

태주: 몰라요.

수장: 어떻게 몰라?

태주: 아저씨는 왜 장화 신고 있는데요?

수장: 몰라.

태주: 어떻게 몰라요?

수장: 아, 몰라!

태주: 봐요. 모르잖아요, 아저씨도.

수장: 그래. 그쯤 해두자.

태주: 어차피 돈 빌려주지도 않을 거면서.

수장: ……집으로 가.

[2022 매일신춘문예 희곡·시나리오 당선작] 집으로 가는 길. 일러스트 전숙경
[2022 매일신춘문예 희곡·시나리오 당선작] 집으로 가는 길. 일러스트 전숙경

수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정의 구두를 들고 가려 한다. 태주는 수장이 가는 게 서운한 듯, 수장을 본다.

태주: 아저씨.

수장: 왜.

태주: 저 그 구두 한 번만 신어보면 안 돼요?

수장: 너 이거 되게 비싼 거야.

태주: 그러니까요. 한 번만요.

수장, 잠시 고민하다가 태주 앞에 구두를 내려놓는다. 태주, 구두를 신어본다. 태주의 발에 구두가 꼭 맞다.

태주: 진짜 예쁘다. 이런 구두 처음 봐요. 아줌마 발이 엄청 작네요.

수장: 속이 좁아서.

그때, 다정이 휴게소 음식을 가지고 온다.

다정: 내 구두 어디 있어?…… 어?

수장: 이 학생이, 아, 학생 아니라고 했지. 이 친구가…….

태주, 놀라서 구두에서 발을 뺀다. 다정은 음식을 탁자에 내려놓는다.

다정: 안녕. 신어보는 건 상관없는데 지금 이 상황, 설명이 좀 필요하겠지?

수장: 집 나온 애야. 돈 빌려 달라더니 구두 한 번 신어보겠대.

태주: 아저씨!

수장: 맞잖아!

다정: 핸드폰 켜지더라. 먹고 정비소 전화해 보자.

수장: 핸드폰 돼?

다정: 학생도 좀 먹을래? 우리 둘이 먹기엔 좀 많은데.

수장: 학생 아니라니까.

다정, 수장의 신발을 벗고 태주가 신던 삼선 슬리퍼를 신는다. 수장은 의자 위에 양복 자켓을 놓는다. 다정은 자켓이 놓인 자리에 앉는다.

다정: 밥 먹을 동안 우리 바꿔 신자. 나도 신발이 젖어서.

태주: 네? 네.

다정: 이름이 뭐야?

태주: 태주요. 홍태주.

다정: 이름 예쁘다. 난 안다정이야.

수장, 말없이 라면을 먹는다. 다정은 수장의 팔을 툭 친다.

다정: 너는 왜 말 안 해.

수장: 난 백수장.

태주, 웃는다.

다정: 이름 귀엽지? 여기까지 오는데 이름이 한몫을 했지. 아버님한텐 내가 전화 드렸다.

수장: 뭐?

다정: 왜?

수장: 왜 해?

다정: 넌 안 할 거잖아.

수장: 야.

다정: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다고 했어. 차가 고장 났다고. 거짓말 하나도 없다.

수장은 맘에 들지 않는 듯, 한숨을 내쉰다.

다정: 으이구. 언제까지 그럴래? 얘가 속이 좀 좁아.

태주: 어? 좀 전에 아저씨도 아줌마 속 좁다고 했는데.

다정: 뭐라고?

수장: 맞잖아.

다정: 너 커피 마시지 마. (태주에게) 그리고 나 아줌마 아니야.

다정, 수장 앞에 있던 커피를 뺏는다.

수장: 이것 봐.

다정: 그럼 이제 어디로 가?

태주는 아무 말 없이 음식을 먹는다.

수장: 몰라 얘도.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할지. 집은 어딘데?

다정: 다 먹고 말해도 돼.

태주: 집으로는 안 가요.

다정: 왜?

수장: 집 나왔다니깐.

다정: 넌 조용히 해.

태주: 이유는 많아요.

수장: 그니까 왜. 애가 비밀이 많아.

다정: 왜 말을 그렇게 해? 밥이나 먹어.

태주: 아줌마 저 충전기 좀 빌려주세요.

다정: (수장에게) 차에서 충전기 좀 가져와. (태주에게) 그리고 언니라고 해줄래?

수장: 아, 라면 불어.

다정: 내 핸드폰도.

수장, 못 이기는 척 일어나 간다.

다정: 집으로 다시 못 가는 이유가 집을 나온 이유랑 같나?

태주: 비슷해요.

다정: 그럼 계획은 있고?

태주: 모르겠어요.

다정: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면 계획이 필요해. 당장 오늘은 어디서 자려고?

태주: 모르겠어요…… 저 돈도 좀 빌려주세요.

다정: 돈?

태주: 서울 가서 꼭 갚을게요. 진짜로. 저 알바 할 거예요. 면접 보기로 한 곳도 있어요.

다정: 학생을 써 준대?

태주: 학생인 거 몰라요.

다정: 그럴 수가 있나? 어디서 면접 보는데?

태주는 대답이 없다.

다정: 너가 오늘 처음 본 나한테까지 대답 못 하는 거 보면 너도 그게 잘못된 걸 아는 거네. 그럼 굳이 하지 않는 게 좋아. 집이 싫어서 나왔으면서 나와서까지 뭐하러 잘못된 것부터 시작해. 그것도 곧 싫어질걸.

태주: 지금보다 더 싫어질 건 없어요.

다정: 그래도 나쁜 일은 결국엔 싫어져.

태주: 다른 사람한테 나쁜 일이라고 해서 저한테도 나쁜 일이 되는 건 아니에요.

다정: 그래. 그건 그럴 수 있겠다. 집은 왜 가기 싫은데?

태주: 언니는 말해도 몰라요.

다정은 태주의 대답을 기다린다.

태주: ……집에 혼자 있기 싫어요. 엄마도 싫고.

다정: 집에 혼자 있어?

태주: 아빤 원래 없고, 엄만 맨날 나가요. 이상한 사람들 만나요.

다정: 이상한 사람들?

태주: 네. 이상한 아저씨들이요. 엄마가 집 보증금도 빼서 어차피 곧 나가야 해요.

사이

태주: 전 엄마가 아팠으면 좋겠어요. 아프면 집에 있으니까.

사이

태주: 지금 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죠?

다정: 아니. 난 그래도 너가 일단 집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태주: 아저씨랑 똑같네. 언니가 뭘 알아요?

다정: 나랑 걔랑 똑같은 게 아니라 대부분 똑같이 말할 거야.

태주: 자기 일 아니니까 똑같이 말하겠죠. 그렇게밖에 생각 안 하니까.

다정: 아니. 집 나와 본 사람들은 다 알아. 걔도 나도 집을 나왔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고.

태주: 뻔하지. 집 나오면 고생한다고요?

다정: 너 지금 이러고 있는 건 고생 아닌 것 같아? 땀 흘리고 눈물 흘리는 것만 고생 아니다, 너.

태주: 안 빌려줄 거면 함부로 말하지 마요!

다정: 집으로 가. 가서 엄마 기다려.

태주: 제가 엄마를 왜 기다려요! 엄마가 저를 기다려야죠!

다정: 엄마라고 꼭 자식을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야.

태주, 말이 없다.

다정: 엄마가 너를 안 기다리면 너가 기다려줄 수도 있는 거지.

태주: 엄만 저 안 필요해요.

다정: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엄마 너 필요해.

사이

다정: 내가 기다려봐서 알아.

태주는 말없이 다정을 쳐다본다.

다정: 돈은 빌려줄게.

태주: 됐어요.

다정: 갚진 않아도 돼.

태주: 왜요? 지금 저 불쌍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다정: 아니. 내가 널 왜 불쌍하게 생각해?

태주: 집 나오고 갈 데 없고 돈 없다고 하니까 불쌍하게 생각하는 거 맞잖아요!

다정: 내가 안 갚아도 된다고 해서 그래?

태주는 울음을 터뜨린다. 다정은 태주에게 휴지를 건네고, 태주의 울음이 그치길 기다린다. 그때 수장이 온다. 수장은 쇼핑백을 들고 있다.

수장: 왜 그래? 울어?

다정: 내가 그런 거 아니야. 울지 마. 빌려준다니까?

수장: 뭘 빌려줘? 돈?

다정: 그럼 어떡해.

수장: 집으로 보내야지. 돈을 빌려준다고 해?

다정: 집에 가기 싫다잖아.

수장: 싫다고 안 보내?

다정: 너도 지금 싫다고 안 가고 있잖아.

수장: 나랑 얘랑 같아?

다정: 다를 건 뭐야. 집 나온 건 똑같지.

수장: 안다정!

태주: 아줌마 아저씨가 왜 싸워요!

다정: 우리 싸운 거 아니야. 나 그리고 아줌마 아니라니까.

수장: 싸운 거 아니야. 얘기한 거야. (다정에게) 그리고 너가 왜 아줌마가 아니야? 아줌마지.

다정: 빌려줄게.

수장: 데려다줄게. 집으로 가자.

다정: 싫다는 애를 왜 자꾸 밀어붙여?

수장: 넌 어른이 왜 그러냐?

다정: 너 왜 어른인 척해?

태주: (동시에) 왜 자꾸 어른인 척해요?

다정: 어른도 아니면서.

수장: 자, 우리 이러지 말고 생각을 하자. 생각.

다정: 무슨 생각을 해. 너 집에 갈 거야? 차 고치는 대로 바로 가?

수장: 아, 나 말고! 태주!

다정: 태주 집에 보낼 거면 너도 집 가!

수장: 너 왜 그래?

다정: 결혼할 사람 부모님 뵙겠다는 게 이상한 거야?

수장: 그 인간은 볼 필요 없다니깐.

다정: 넌 우리 엄마 봤으면서 난 왜 못 보게 해?

수장: 부모가 아니니까 그렇지.

다정: 너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게 되냐? 괜히 고집이야.

수장: 넌 다 알면서 왜 고집이야?

다정: 지금 내가 이러지 않게 생겼어? 그럼 아버님 뵙지도 않고 그냥 식 올려? 그럴까? 너 내 생각은 안 해?

태주, 일어난다.

태주: 저 갈래요.

수장: 어딜 가?

태주: 무슨 상관인데요. 어차피 다 자기들이 중요하지. 다 똑같아.

태주, 다정의 구두를 벗는다.

태주: 제 신발 주세요.

다정: 미안해. 태주야.

태주: 신발요. 제 신발 주세요. 갈 거예요.

수장: 일단 충전기. 우린 또 있어.

수장, 태주에게 충전기를 건넨다.

다정: 왜 줘. 여기 충전할 데도 없어.

수장: 어쨌든 필요하잖아.

다정은 슬리퍼를 벗는다. 태주는 다정이 신던 슬리퍼를 신으려 한다. 수장은 쇼핑백에서 운동화를 꺼내 태주 발밑에 내려놓는다.

수장: 이거 신어. 슬리퍼도 커 보이던데.

다정: 어디서 찾았어?

수장: 트렁크에 있길래.

다정: 신어. 그거 나 몇 번 신지도 않은 거다. 빌려주는 거야.

태주: 신발 빌려달라고 한 적은 없어요.

다정: 그럼 가져. 어차피 나 이제 이거 안 신어.

태주는 망설이다 수장이 건넨 운동화를 신는다. 다정은 다시 태주의 삼선 슬리퍼를 신는다.

다정: 그럼 난 이거 신어야지!

그때, 빗물이 조금씩 떨어진다.

수장: 비 또 오기 시작한다. 일단 차로 가자.

태주: 집 안 간다고요!

수장: 알겠어. 일단 가자. 곧 엄청나게 쏟아질 거야.

다정: 차 고치면 우리 집으로 가자.

태주: 네?

다정: 지금은 가기 싫다며. 나도 얘도 좀 씻어야 하고. 너 핸드폰 충전도 해야 하잖아.

수장: 그래. 가서 충전하고 집에 전화해. 너 어디 있는지는 아셔야 할 거 아니야.

다정: 너도. 너도 가서 집에 전화해.

수장: 아…….

다정: 알겠지?

태주: 어차피 전화 안 받을 거예요.

다정: 받을 때까지 해. 문자를 남겨 놓던가.

태주: 뭐라고 해요?

수장: 친구 집에 있다고 해.

태주: 거짓말이잖아요.

다정: 뭐가 거짓말이야. 같이 기다려줄게. (수장에게) 너도 꼭 전화해. 안 그러면 두 사람 다 오늘 집에서 쫓겨날 줄 알아.

수장: 가면서 뭐 사 가자. 집에 아무것도 없어.

다정: 약속했다. 가자!

세 사람, 일어난다. 태주는 수장과 다정을 따라가다가 뭔가 깜박 잊은 듯 뒤돌아본다. 태주, 테이블 쪽으로 다시 돌아가 캐리어를 끌고 온다. 세 사람, 함께 간다.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진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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