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위안부, 아들은 양민 학살 희생자…우리 엄마는 얼마나 고초가 심했을까요."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때부터 1950년까지 이뤄진 민간인 학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5) 할머니도 그 아픔의 한가운데 서 있다. 그에게는 위안부와 함께 뼈아픈 기억이 하나 더 있다. 할머니의 세 살 터울 오빠 이종팔(1925년생) 씨는 한국전쟁 전후에 있었던 '국민보도연맹'의 희생자였다.
매일신문은 지난 8월부터 최근까지 이용수 할머니를 취재했다. 할머니의 기억 속 오빠는 '독립운동가'였다. 늘 "조선 찾으러 간다"고 당당히 나섰던 오빠는 1950년 7월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넜다. 기억이 자꾸 희미해져가지만 더 늦기 전에 이용수 할머니는 정부에 빠른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할머니의 기억 속 오빠는 11~13살 어릴 적부터 공부하러 간다며 집을 자주 비웠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 온 오빠는 긴 중국풍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고 금세 또 집을 나섰다. "오빠 어디 가노?"라고 물으면 "만주 봉천에 조선 찾으러 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오빠가 돌아오면 할머니는 "조선을 보여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오빠가 돌아오면 '조선'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오빠는 '조선이 크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그러면 어떻게 찾아오노'하면 오빠는 '그래도 찾아올 수 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마라'고 했다"며 "오빠는 속옷 끈에 빨간색, 파란색으로 칠한 창호지를 작고 동그랗게 돌돌 말아 넣어다녔다. 그게 태극기였던 셈이다"고 했다.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온 1946년 이후 오빠의 모습은 쉽게 볼 수 없었다. 오빠가 뭘 하는지도 몰랐고 묻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8월이었다. 할머니는 꿈을 꿨다. 아주 커다란 목화밭이었는데 건너편에 오빠가 "수야"하며 그를 불렀다. 오빠에게 가려고 하니 오빠는 오지마라고 손짓했다.
찝찝한 꿈을 어머니에게 말하니, 어머니는 대구형무소로 이 할머니를 보냈다. 그곳에 오빠가 있으니 오빠의 상태를 확인해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형무소 직원의 답은 "7월 30일 (이종팔 씨에) 고깔을 씌워 죽였다"였다. 뒤늦게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전쟁 발발 직후 대구 전매청 뒤에서 다섯 청년이 오빠한테 다짜고짜 (보도연맹 가입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고, 오빠가 거부하자 칼을 들이대며 도장을 억지로 빼앗았다"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는 "'엄마, 오빠가 죽었대'라고 하니 엄마가 땅에 주저앉아 다리를 뻗쳐 엉엉 울었다. 내가 오빠를 찾으러 가기 전 엄마도 아들이 형무소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왜 오빠가 잡혀 갔는지 당시 어르신들은 아무 것도 몰랐다. 1946~1950년 사이 이뤄진 민간인 학살 피해자였다"고 했다.
지난 7월부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기 조사를 받고 있는 이용수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오빠 시신이라도 꼭 찾아줬으면 한다"고 했다. 오빠에 대한 기억이 얼마 없는 상황에서 본인이 살아 있을 때라도 하루 빨리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부모님도, 나도 오빠의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이제라도 제대로 밝혀졌으면 좋겠다. 이제 유골이라도 찾아서 무덤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보도연맹=정부가 1949년 4월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한 반공단체로, 지역별 할당제를 통해 가입을 독려하면서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정부의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름만 등록된 많은 사람들이 좌익으로 내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대구 보도연맹원들은 전쟁 직후 대구형무소 재소자들과 함께 가창골과 달성 중석광산,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로 끌려가 학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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