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환국 밝족의 역사(4)

'승리의 화신' 치우현왕, 어쩌다 악마가 되었나

◆중국의 홍산문화紅山文化는 치우현왕 시대 환국 유적이다

'산해경山海經'에 "대황 동북쪽 모퉁이에 산이 있는데 그 이름을 흉려 토구라 한다.(大荒東北隅中有山,名凶犁土丘)"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여犁는 여산黎山이고 이 여산이 바로 치우 현도씨의 여씨黎氏, 여국黎國, 구려九黎의 발상지라고 본다. "흉려 토구凶犁土丘"에서 토구는 산을 가리키고 흉할 흉凶은 여산을 설명하는 형용사로서 치우를 폄하하기 위해 덧붙여진 글자이기 때문이다.

황제와 함께 삼조당에 모셔진 치우상.

대황大荒 즉 광대한 황야의 동북쪽 모퉁이라면 중원지역이 아닌 중국의 동북방 드넓은 초원지대, 오늘날의 내몽골 일대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치우가 황제黃帝의 침략에 맞서 싸운 곳도 중국 동북방 지금의 하북성 탁록涿鹿 일대였다.

'산해경'의 기록과 당시 치우의 거점이 탁록이었던 정황에 비추어 본다면, 현도씨玄都氏 치우 구려 부족의 발상지는 동북방, 특히 동북방의 요서遼西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홍산문화의 제단유적.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후 오늘날의 내몽골 적봉시, 요녕성 조양시를 중심으로 건립된 홍산문화는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대형제단, 여신을 모시는 신전, 망자의 무덤인 적석총으로 상징된다.

홍산문화의 제단, 여신전, 적석총은 북경의 천단, 태묘, 명13릉과 동일한 구조로 조성되어 중국의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건국 전야의 유적으로 평가한다.

동일시기 전 중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로 평가되는 요서遼西의 홍산문화는 동아시아 문명의 서광曙光으로 인식되면서도 그동안 그 문화를 일으킨 주역이 과연 누구인지 실체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근래 일부 중국 민족주의자들 가운데는 황하 서쪽의 황토고원에서 주로 활동한 한족의 시조 황제헌원을 홍산문화의 주역으로 둔갑시키려는 시도가 있다. 동북공정 차원의 논리적 비약으로서 홍산문화가 황제문화라고 주장하는 뇌광진雷廣臻 교수가 대표적이다.

홍산문화의 적석총유적.

중국 동북방 발해유역에서 발굴된 홍산문화는 5,500년 전 단군의 고조선에 한발 앞서 건국된 치우 현왕 환국의 유적이 확실하다. 이는 현도씨玄都氏 구려 부족의 현도국, 치우환웅 환국의 존재를 증명하는 실물 유적인 것이다.

특히 내몽골 적봉시 홍산紅山, 요녕성 조양시 일대는 환국의 중심지 다시 말하면 구려 부족의 최고 지도자 치우蚩尤 현왕이 직접 통치했던 현도국의 수도 서울이었다고 하겠다.

◆최초로 금속무기를 발명한 치우 현왕

'세본世本' 작편作篇에는 "치우가 다섯 가지 병기를 창조했다.(蚩尤作五兵)" 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치우가 최초로 금속을 사용하여 무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치우가 당시 다른 부족에 앞서 먼저 선진적인 병기를 발명한 사실은 '관자管子' 지수편地數篇에도 나와 있다. "치우는 갈로산葛盧山에서 흘러나오는 금속수金屬水를 이용하여 검劍, 개鎧, 모矛, 극戟을 제조하여 9개 제후국가를 겸병하고 또 옹호산雍狐山에서 흘러나오는 금속수金屬水를 이용하여 장과長戈, 단과短戈를 제조하여 12 제후국을 합병했다"

하북성 탁록현에 있는 중화삼조당.

몽둥이 돌팔매를 가지고 싸우던 상고시대에 금속무기의 발명은 비록 자연동自然銅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로 한 시대의 획을 긋는 대발명이었다.

그래서 치우는 당시에 이와 같은 선진적인 무기를 이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사람들로부터 전신戰神으로 추앙 받았다. 선진적인 병기와 뛰어난 전략으로 동이족의 활동무대를 중국 동북방에서 동남방까지 크게 확대시킨 것이 환국의 현왕 현도씨 치우였다.

◆환국 밝족의 치우 현왕은 악마가 아닌 승리의 화신이다

홍산문화유적이 최초로 발견된 내몽골 적봉시의 홍산.

치우현왕은 홍산문화를 창조한 구려 부족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 자손들이 중원에 진출하여 세운 나라가 상나라였고 동북방 발해만 유역에 건설한 나라가 밝조선이었다.

화하족의 시조 황제헌원이 서방에서 중원으로 진출하여 집권한 이후 다른 부족들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치우의 화상畵像을 각 지방에 내걸도록 하여 사방을 진정시키고 천하를 안정시켰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는 승리의 화신 치우의 위상이 당시 황제헌원을 훨씬 능가하였음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홍산문화 유적 분포도.

'주례'에 의하면 서주시대에 국가에서 군사훈련을 할 때는 먼저 군신軍神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군신이 바로 치우였다고 말하고 있다. 치우를 군신으로 추앙하는 전통은 진시황제를 거쳐 한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

진시황은 통일천하를 이룩한 뒤에 치우를 병신兵神으로 받들었고 한고조 유방은 출전을 앞두고 치우 현왕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도 치우천왕에게 세 차례나 제사를 지냈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치우 현왕이 동양 역사상에서 승리의 화신으로 추앙되었음을 반증한다.

홍산문화 유적의 여신전에 모셔진 여신상.

그런데 동이족의 위대한 영웅 치우는 후일 중국에서 공자의 존화양이尊華攘夷 사상에 의해 악마로 폄하되었고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치우를 한족의 시조 황제헌원과 싸우다 사로잡혀서 죽은 패자로 묘사하였다.

치우는 환국 밝족의 제왕이자, 현도국의 현왕으로서 동이족과 화하족 모두로부터 승리의 화신으로 추앙받은 위대한 영웅인데 오늘날 치우에게 패자와 악마의 굴레가 씌워져 있는 것은 한족 민족주의의 산물이다.

◆승리의 화신 치우 현왕은 한국인의 위대한 조상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를 인솔하고 태백산에 와서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개국하였는데 그 나라 이름을 신시神市라 한다."라고 하였다. 신시는 귀신의 도시가 아니라 신선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삼성기전' 상편에 "신시의 말엽에 치우천왕이 청구로 강역을 넓혔다 (神市之季 有蚩尤天王 恢拓靑丘)"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신시의 환웅천왕 말기에 치우천왕이라는 영웅이 나타나서 신시의 강역을 청구까지 확대한 사실을 의미한다.

청구는 오늘날 산동성 일대를 가리키므로 치우시대에 동북방 내몽골 적봉시 부근에서 동쪽의 산동성 방향으로 강역을 크게 넓힌 것을 설명한 것이다.

치우천왕을 도깨비로 형상화한 붉은악마의 로고.

또한 '삼성기전' 하편에서는 "14세 자오지 환웅을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호칭하는데 도읍을 청구국으로 옮겼다(十四世 慈烏支桓雄 世稱蚩尤天王 徙都靑邱國)"라고 말했다. 이 내용은 좀더 구체적이다. 치우천왕은 환국의 14세 환웅으로서 신시에서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사실까지 언급하고 있다.

'삼성기'는 조선왕조 '세조실록'에도 이름이 등장하는 선가사서로서 불가의 '삼국유사', 유가의 '삼국사기'에 필적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대사서다.

앞서 '시경'과 '일주서', '죽서기년'을 통해 환국 밝족의 현도씨 치우 현왕이 동이족 상나라의 시조임이 증명되었는데 이제 '삼성기전'을 통해서 다시 치우현왕은 환국의 14세 환웅으로서 우리 한민족의 위대한 조상임이 입증된 것이다.

◆자기 조상을 악마 취급하는 나라 한국, 국혼이 죽어 있다는 반증

한국에서 지금 치우천왕은 승리의 화신이 아니라 붉은 악마로 상징된다. 부끄럽게도 자기 조상을 악마 취급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들의 시조 황제헌원이나 천조대신을 악마 취급하는 일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중국의 한족들은 치우 현왕을 악마 취급하다가 지금은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지어 황제헌원, 염제신농과 함께 중화 조상의 한 분으로 받들고 있다. 왜 중국인들이 치우천왕을 떠받드는 것일까. 그가 승리의 화신임을 알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치우를 자기 조상으로 만들려고 사당을 세워 정중히 모시는데 정작 치우천왕의 후손인 한국인들에게서 악마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국혼이 죽어 있다는 단적인 반증이다. 그래서 국부를 넘어 국혼을 살리는 것이 한국인에게 당면한 최대의 시대적 과제인 것이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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