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강방어선전투] <2>인천상륙작전 토대된 '칠곡 다부동전투'

北 광복절까지 대구 점령 목표 3개 사단 이끌고 다부동 맹공격
백선엽 "내가 물러서면 날 쏴라"…北, 소1천 마리 값 현상금 걸어
328고지 12일간 주인 15번 변경…국군 9번 백병전 유학산 되찾아

6·25전쟁 다부동전투가 치열했던 유학산 전경. 북방을 향해 횡격실을 이루고 있다. 새경북 드론피아 제공
6·25전쟁 다부동전투가 치열했던 유학산 전경. 북방을 향해 횡격실을 이루고 있다. 새경북 드론피아 제공
다부동지구 전적비. 정원식 씨 작.
다부동지구 전적비. 정원식 씨 작.

1950년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군의 최종 목표는 '8월 15일까지 부산 점령'이었고, 7월 말까지는 순조롭게 달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양상이 달라졌고, 목표는 '광복절까지 대구 점령'으로 수정됐다.

국군 제1사단은 방어지역 조정에 따라 8월 13일 다부동 일대 새로운 방어선에 배치됐다. 다부동은 북한으로서는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고, 국군과 UN군에게는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곳이었다. 이곳이 뚫리면 임시수도 대구는 적 포격의 사정권에 놓이게 되고,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를 불러올 수 있었다.

백선엽 제1사단장은 "나는 내심 그곳(다부동)을 우리 방어선으로 설정했고, 마지막 선이었다"고 후일 술회했다. 다부동전투는 방어를 공세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격전지이며, 대한민국을 지켜낸 전투이자 세계가 함께 공산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전투였다.

다부동전투 재연 장면. 국군과 북한군이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 정운철 작
다부동전투 재연 장면. 국군과 북한군이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 정운철 작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국군 제1사단을 방문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국군 제1사단을 방문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피와 죽음으로 사수한 고지

북한 김일성은 수안보까지 내려와 광복절에 대구를 점령하라고 독전했다. 전투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 제3·13·15사단은 국군 제1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다부동 일대를 맹공격했고, 국군은 죽기 살기로 총력 방어전을 펼쳤다. 적과 아군은 병력 2만1천500명 대 7천600명, 박격포 이상 각종 포 670문 대 172문 등 비교가 되지 않았다. 특히 적은 국군이 없는 전차가 20대나 있고 자주포도 다수 보유했다.

그렇다고 환경만 탓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백선엽 제1사단장은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며 돌격 명령을 내리고 선두에서 달려 나갔다. 장병들도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한 날 한 시로 하자"는 비장한 맹세와 함께 주저 없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칠곡 석적읍 328고지는 12일 동안 고지 주인이 15번이나 바뀌었다. 328고지는 방어는 불리하지만 낙동강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고, 점령할 경우 왜관으로 진출하기 쉬워 피아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국군 제1사단 최병형 소령은 "하루에 보충병 500~600명을 받고 한번 전투를 치러고 나면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시체를 땅에 묻을 시간이 없어 그대로 싸웠다"고 술회했다.

8월 21일 다부동에서는 6·25전쟁 최초 전차전이 펼쳐졌다. 전차포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골짜기의 도로를 따라 날아가는 광경이 마치 볼링공이 미끄러져 가는 모습과 비슷해 미군은 볼링앨리(Bowling Alley) 전투라 이름을 붙였다. 다음날 북한군 전차 9대와 자주포 4문, 수대의 트럭 그리고 1천300여구의 시신이 확인됐다. 이 전투 이후 한·미는 서로를 깊이 신뢰할 수 있게 됐다.

다부동 일대의 도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유학산을 먼저 점령한 것은 북한군이었다. 국군 제1사단 12연대는 깎아지른 암벽을 맨손으로 올라 북한군 제15사단과 아홉차례나 백병전을 치렀고, 1천여 병력손실 끝에 고지를 점령해 대구 방어 관문을 지켰다. 12연대 박판동 일등병은 "고지를 점령하고 보니 적 기관총 사수가 나무에 묶여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비인도적이고 악독스런 잔인성의 표본이었다"고 치를 떨며 증언했다.

수암산 고지에서는 보급을 담당하던 노무자들도 매일 50~60명이 희생될 만큼 많이 죽었다. 정영조 상사는 "수류탄전이 벌어졌는데, 파편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고 회고했다.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 징비록'에 "3개 연대인 우리 사단에 북한군 정예 3개 사단이 덤벼왔다. 당시를 떠올리면 마음이 무겁다. 수많은 장병과 학도병, 이름 없는 노무자들…. 우리는 그들의 희생으로 무덥고 잔혹했던 그해 여름을 견뎠다"고 썼다.

다부동 가산산성 전투 현장에서 발굴된 국군 유해. 전우가 정성껏 묻어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인욱 자유총연맹 칠곡지회장 제공

다부동 가산산성 전투 현장에서 발굴된 국군 유해. 전사한 모습 그대로 호국영령이 됐다. 이인욱 자유총연맹 칠곡지회장 제공
다부동 가산산성 전투 현장에서 발굴된 국군 유해. 전우가 정성껏 묻어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인욱 자유총연맹 칠곡지회장 제공
다부동전투가 벌어지는 어느 고지로 노무자들이 지게로 군수물자를 나르고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다부동 가산산성 전투 현장에서 발굴된 국군 유해. 전사한 모습 그대로 호국영령이 됐다. 이인욱 자유총연맹 칠곡지회장 제공

◆백선엽 목숨 값은 소 1천 마리

국군 제1사단 11연대 의무지대장 강성모 중위는 하루 평균 60~70명을 치료했다. 이는 대대 전투 병력이 150~200명인 당시를 감안하면 매일 1개 대대의 절반은 죽거나 다치는 셈이었다. 먹는 약은 아스피린, 외과 약품은 알코올과 붕대가 전부였다.

당시 의무대 치료원칙은 계급 순서가 아니었다. 희망이 없는 중상자 제일 나중 치료였다. 그는 "총상으로 폐가 관통돼 내출혈이 일어나도 쉽사리 죽지 않는다. 전투는 사람을 초인으로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기동성이 좋은 미군 부상자는 후방으로 이송됐는데, 당시 미군들은 '전투 중 죽지만 않으면 부상 당해도 산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8월 19일 밤 적 돌격대가 제1사단 사령부인 동명국민학교를 습격했다. 백선엽 사단장은 부관이 깨워 일어났다. 다발총과 기관총 총성과 수류탄 폭음이 들렸고 통신병 등이 전사했다. 적은 백 사단장을 생포하기 위해 야간 기습한 것이었다. 적군은 운동장에서 숙영 중이던 8사단 병사들에 의해 격퇴됐다.

훗날 백 사단장은 "김일성이가 나를 붙잡는 인민군에게 1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답니다. 평양에 입성해 보니 소 한 마리 가격이 100원이었으니까 내 목숨이 소 1천 마리 가격이었던 셈이지요"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백선엽 사단장 부대지휘 요체는 'go and see'였다. 몸소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제1사단 문형태 작전참모는 "사단장님은 적에 대해서는 최대한 타격을 주고 전장에서 뒤통수를 보이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기억했다.

한편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관계자는 "잊혀져가는 다부동전투와 낙동강 방어선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안보교육 강화, 호국용사에 대한 적절한 보상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다부동전투 현장. 진지는 초토화되고, 포격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다부동전투가 벌어지는 어느 고지로 노무자들이 지게로 군수물자를 나르고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왜관지구 전적비. 김혜경 씨 작.
다부동전투 현장. 진지는 초토화되고, 포격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호국평화의 근원 다부동

6.25전쟁 당시 다부동은 60여호의 한촌이었다. 하지만 국도 5번과 25번이 합쳐지고 997 지방도로 왜관과 연결된다. 좌측 유학산이 북방을 향하여 횡격실을 이루고 우측에는 해발 902m 가산이 있어 방어에 유리한 요충지였다.

게다가 지형상 이 방어선이 돌파되면 10㎞ 남쪽 도덕산(660m) 일대까지 철수해야 해 대구가 적 지상포화의 사정권 내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다부동 일대는 대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지인 것이다.

국군 제1사단은 이러한 지형의 이점을 활용해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혈전을 벌인 끝에 생사기로에 직면한 전황을 극복했다. 다부동전투는 기습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낙동강 방어선까지 남하한 적으로부터 작전의 주도권을 되찾고,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 한 결전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 독일의 대공세를 좌절시킨 베르됭전투(제1차 세계대전 최대 규모)의 축소판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보잘 것 없는 이 산촌은 일약 전쟁사에 길이 남게 됐고, 이 다부동을 품은 칠곡군은 호국평화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왜관 자고산 고지(303 고지)에서 북한군에 포로가 됐다 손이 묶인채 학살당한 미군.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왜관지구 전적비. 김혜경 씨 작.
왜관 자고산 고지(303 고지)에서 북한군에 포로가 됐다 손이 묶인채 학살당한 미군.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왜관철교 폭파와 미군 집단학살

8월 3일 아침부터 왜관철교 주변에는 사이렌이 울리고 전단이 뿌려졌다. 오후 6시까지 지역에서 퇴거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해 사살한다는 포고였다. 낙동강 방어선 내 적 게릴라 침투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주민과 피난민들은 우왕좌왕했다.

이날 오후 8시 30분 미군은 왜관철교를 폭파했다. 왜관쪽 둘째 경간 63m가 끊어졌다. 북한군이 강을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다리를 건너려던 많은 피난민도 희생됐다.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면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는 건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북한군이 제일 먼저 공격한 곳은 왜관 낙산리 금무봉(268m)이다. 8월 9일 새벽 적들은 개인 화기와 옷을 머리에 이고 건너편 노티 나루터에서 깊이 1.65m의 낙동강을 건넜다. 한참 후 이를 발견한 미군은 보·포병 사격을 가했으나 적들은 금무봉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오후 케이 미 제1기병사단장은 경전차 소대와 보병을 돌격시켜 오후 4시 정상을 탈환하고 달아나는 적을 섬멸했다. 적은 700여 명, 미군은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미군이 처음 한국군 지원병을 편입, 병력을 보충했는데 이것이 카투사 탄생의 계기가 됐다.

왜관읍 303고지에서는 미군이 북한군에 집단 학살당했다. 이곳에서 북한군은 미군 포로 46명의 손을 묶고 계곡에 몰아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했다. 6명이 살아 남아 북한군의 야만성과 낙동강 전투의 치열함을 알렸다. 8월 16일에는 미 B-29 폭격기 98대가 낙동강 서쪽 강변에 960t의 융단폭격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 폭격이었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