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코로나가 끝나면 가고 싶은 그곳]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

권력과 사치가 만든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왕실
50년 동안 막대한 비용 투입…건축·장식·조경가 대거 참여
습지였던 땅에 숲·분수 조성…인부 3만 동원 센강서 물 조달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와 예술가들이 궁전 상판에서 못 하나까지 모두 당대 최고의 인테리어로 장식했다.프랑스 바로크건축의 백미.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와 예술가들이 궁전 상판에서 못 하나까지 모두 당대 최고의 인테리어로 장식했다.프랑스 바로크건축의 백미.

◆베르사유의 장미

1970년대 필자는 거의 모든 신박한 지식과 세계사 대부분을 만화를 통해 익힌 만화광이었다. 당연히 당시 모든 소녀들처럼 원작자가 이케다 리요코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일본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전개되는 서사와 그림체에 빠져들었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루이 14세의 왕권신수설, 프랑스 혁명기 민중들의 굶주림과 봉기,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를 말랑말랑한 뇌에 각인시켰을 따름이었다.

물론 그 제목부터 베르사유의 오기였다는 것과 루이 14세 발언의 진위조차 모호하다는 것 그리고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도 루소가 참회록에 썼던 내용이었다는 것을 수십 년 후에야 알았다.

그때는 그저 총천연색 사인펜으로 푸프(pouf) 머리를 하고 섬세한 레이스 드레스를 입었던 왕비의 비극적 결말에만 온갖 상상을 하던 때였으니. 어쨌든 베르사유로 나를 이끈 것은 나중에 앙드레 모로아로 옮겨갔지만 시작은 그 만화였다.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

◆루이 14세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파리에 온 지 한 달 남짓 되던 날, 생 미셸역에서 원 데이 패스를 구입했다. RER C5선엔 천장이 높은 2층 열차가 서 있었다. 여행서에 믿거나 말거나식으로 '혁명기 그 분들'의 으스스한 괴담이 많다는 그 열차를 타고 30분쯤 달렸을까. 베르사유 리브 고슈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기념품점이 있는 건널목을 지나 시청 옆으로 돌아서니 금방 베르사유 궁전이다.

베르사유는 원래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루이 13세의 사냥터였다. 루이 14세는 아버지의 급사로 다섯 살에 즉위했고(세계에서 재위 기간이 가장 길다.) 섭정 추기경이자 재상인 마자랭이 사망한 1661년부터 친정(親政)했다.

그때 자신의 궁에 비해 어마어마하고 화려한 보 르 비콩트를 완공해 자신의 부를 과시한 재무장관 푸케의 궁을 둘러본 루이 14세는 자존심을 심하게 다쳤고, 결국 푸케를 횡령으로 재산을 몰수하고 종신감금형에 처했다. 그리고 푸케의 건축가 르 보, 망사르, 실내 장식가 르 블랑, 조경가 르 노트르 등을 대거 참여시켜 50년 동안 막대한 비용을 들여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둘러보고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둘러보고 있다.

베르사유는 원래 습지였다. 땅을 완전히 바꾸어 숲을 만들고, 분수를 만들기 위해 몇 개의 강줄기를 돌리고, 거대한 펌프를 만들어 센 강의 물을 길어다 붓기까지 무려 3만여 명의 인부가 매년 동원되었다. 루이 14세와 예술가들은 궁전 상판에서 못 하나까지 모두 당대 최고의 인테리어로 장식했다.

말 그대로 유사 이래 가장 화려한 루이 14세 양식의 프랑스 바로크건축의 백미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궁전이 완공되기 전인 1682년부터 불결하고 범죄가 들끓던 당시의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겨 사실상 천도를 단행했다. 그리고 매일 수백 명의 귀족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열었다.

이것은 루이 14세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언제 반기를 들지 모르는 귀족들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나약하게 만들려는 앙시앵 레짐(프랑스 혁명 전의 구 체제, 구 제도)의 시작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증손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불러오는 씨앗이 되고 만다.

왕실 소성당의 높은 천장에는 성서의 삼위일체와 부활과 재림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왕실 소성당의 높은 천장에는 성서의 삼위일체와 부활과 재림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화려, 사치, 낯설지 않은

베르사유 궁전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왕과 그 가족들, 그를 수행하는 시종과 호위병들 그리고 지방 각지에서 올라온 귀족들이 상주하던 거대한 아파트 같았지만 모든 건물들과 정원은 화려 그 자체였다. 가장 먼저 들른 왕실 소성당의 높은 천장에는 성서의 삼위일체와 부활과 재림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1770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고.

각각 방마다엔 신의 이름과 그 해당 신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방 천장에는 헤라클레스가, 사냥과 달의 여신 디아나가 장식된 디아나의 방, 전쟁의 신 마르스에 관한 장식이 된 마르스의 방, 미의 세 여신에 둘러싸인 비너스의 모습이 그려진 비너스의 방, 이런 식이다. 그리고 비너스의 방 정면에는 우리가 익히 본 로마식 복장을 한 루이 14세의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길이가 70m에 이른다. 주요 정부의 행사들이 열린 곳이며,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길이가 70m에 이른다. 주요 정부의 행사들이 열린 곳이며,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머큐리의 방, 루이 14세의 용맹스러운 기마상 부조가 그려진 전쟁의 방, 화려한 은제 왕좌에 앉아 접견을 한 '옥좌의 방'인 아폴론의 방은 루이 14세를 태양왕이란 별칭을 만드는데 한 몫을 한 듯 했다. 왕의 침실과 대칭점에 왕비의 침실이 있는데 가장 마지막으로 사용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과 침구까지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화려한 벽에는 루이 16세,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 테레즈와 오빠인 요셉 2세의 근엄한 초상화가 걸려 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방은 역시 거울의 방이다. 총 길이 73m, 넓이 10.50m로 17개의 창문과 578개의 거울이 있고 창밖으로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천장에는 비제 르 브룅이 그린 루이 14세의 생애를 그린 대벽화가 있다. 수정 샹들리에, 황금 촛대, 화병 등도 당시의 최고급품 그대로 놓여 있다. 1871년 프랑스에 승전한 프로이센이 여기서 독일 제국 수립을 선언했으며,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다.

평화의 방, 귀족의 방, 모차르트가 루이 15세에게 소개되기도 했다는 대기실, 프랑스 혁명 당시 경호원들과 혁명군 사이에 격투가 벌어진 경호원들의 방, 그 외 다비드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그림이 걸린 대관식의 방 등을 기차놀이하듯 다른 관광객들의 뒤를 따라 지나갔다. 이제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들을 지나 그랑 트리아농과 프티 트리아농 그리고 왕비의 촌락을 둘러볼 때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혁명

사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4세와 함께 떼래야 뗄 수 없는 이가 마리 앙투아네트다. 그녀를 후대의 역사가들은 '지은 잘못에 비해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벌을 받은 사람'이라 이른다.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구절이기도하지만 나 또한 공감한다.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 테레즈의 11녀로 비교적 느슨한 에티켓의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지내다가 14세에 엄격한 프랑스 궁정으로로 시집와 18세에 왕비가 되었다.

언어마저 낯선 프랑스 궁정에서 지친 왕비를 위로하기 위해 루이 16세는 프티 트리아농을 선물했고, 철없던 그녀는 인공 연못을 만드는 등 개조 공사에 막대한 세금을 쏟아 붓고 만다. 이후 가짜 목걸이 사건, 스웨덴 귀족 페르센 백작과의 염문 등 대부분 악의에 찬 중상모략이었지만 소빙하기(小氷河期)와 왕실의 실책으로 인해 굶주리던 시민들을 점점 더 분노하게 만들어 혁명의 기폭제가 되고 만다.

1783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 건축가였던 리샤르 미크에게 호숫가에 작은 장식용 촌락을 짓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베르사유 궁전 안에 있는 '왕비의 촌락'이다.
1783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 건축가였던 리샤르 미크에게 호숫가에 작은 장식용 촌락을 짓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베르사유 궁전 안에 있는 '왕비의 촌락'이다.

궁전 뒤쪽 아기자기한 정원에는 농부들이 작물을 가꾸고 있었다. 프티 트리아농은 매우 간결하고 소박한 외관을, 그랑 트리아농은 아름다운 분홍빛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매우 화려했다, 왕비의 촌락은 들어갈 순 없었지만 작은 프랑스식 시골집 지붕이 호수의 잔물결에 얼비쳐 일렁이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주었던 모든 괴로움을 모든 이들이 용서해주기를…' 처형 전 날, 시누이에게 쓴 앙투아네트의 편지지에 젖었을 그 눈물처럼.

박미영 시인
박미영 시인

시인 박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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