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출동 주저한 경찰 대신 보이스피싱범 잡은 택배기사 "피해자 한 명이라도 줄었으면"

지난달 대구서 범인 붙잡아
검거된 수거책은 경찰이 쫓던 조직원
"이름 비슷한 여러 박스 보고 확신 들어"

지난 3월 24일 오후 10시쯤 중구 교동의 한 원룸가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원을 붙잡은 A(35) 씨가 범인을 경찰에 인계하고 있는 모습이 A씨 차량 블랙박스에 찍혔다. A씨 제공
지난 3월 24일 오후 10시쯤 중구 교동의 한 원룸가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원을 붙잡은 A(35) 씨가 범인을 경찰에 인계하고 있는 모습이 A씨 차량 블랙박스에 찍혔다. A씨 제공

지난 3월 24일 오후 10시쯤 대구 중구 교동의 한 원룸가. 킥보드를 타고 온 한 20대 남성이 익숙하다는 듯 원룸 중앙현관으로 들어가 택배상자를 갖고 나왔다. 그는 칼로 박스를 열어 체크카드를 꺼내고 같이 들어있던 물건들은 죄다 전봇대 앞에 버렸다. 같은 방식으로 택배상자 수십 개를 뜯은 뒤 떠날 채비를 하던 그를 화물배송 기사 A(35) 씨가 가로막았다.

A씨가 보이스피싱 조직원을 붙잡을 수 있었던 건 우연찮은 계기였다. 여느 때처럼 배송업무를 진행 중이던 그는 이날 오후 7시쯤 구미에서 대구로 물건을 배송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물건을 수거하기 위해 구미의 한 원룸 건물에 들어서자 갑자기 남성 2명이 나타났다. 보이스피싱 조직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 이들은 A씨에게 "보이스피싱 조직원을 잡기 위해 숨어있었는데, 배송 기사가 올지 몰랐다"며 "경찰에 신고해 범인을 붙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남성 2명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조직은 피해자들에게 돈을 체크카드에 넣어서 구미 한 원룸 건물에 두라고 시켰다. 피해자들은 사기 범죄임을 직감하고 범인을 잡기 위해 현장에서 대기하다가 배송 기사인 A씨와 마주친 것이다.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는 현금 인출이 까다로워지자 돈이 든 체크카드를 넘기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A씨는 곧장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은 A씨가 피해자 연락처와 피해내역을 말해줄 수 없고, 현재 빈박스를 운송 중이라는 말에 출동을 주저했다. 피해자가 없고 피해사실이 명확하지 않으면 입증 문제로 검거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그사이 A씨는 남성 2명과 함께 배송지인 대구 중구 교동으로 원룸가로 출발했다. 중간에 함께 범인을 잡기로 한 남성 2명이 포기한 채 집으로 돌아갔지만 경찰에 신고하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A씨 홀로 대구로 향했다.

배송지인 대구에 도착한 A씨는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사실을 더욱 확신했다. 받는 사람의 이름이 비슷한 택배 상자가 4개나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시 차로 들어가 1시간 동안 원룸 앞으로 지켜보다 박스를 수거하러 온 남성을 붙잡았다.

A씨는 "수거책이 그 일대 여러 원룸을 돌며 박스를 수거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며 "수차례 경찰에 알렸지만 출동하지 않아 직접 범인을 붙잡았다. 피해를 입는 분들이 한 명이라도 줄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검거된 수거책은 대구경찰청 조사를 받고 경기남부경찰청으로 넘어가 현재는 구속된 상태다. 그는 이미 보이스피싱 조직원으로 수사 대상에 올라있던 인물이었다. 대구경찰청 관계자는 "당시 경찰은 정확한 피해사실 없이 추측만으로 출동하기 어려웠다"라며 "보이스피싱은 전국민적인 피해를 일으키는 범죄인만큼 철저히 수사해 국민분들의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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