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능진 위원장 "문석봉·이육사·이상화…'독립운동 성지' 대구에 기념관 지어야"

김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 상임위원장 “국비·지방비 매칭 등 방법 총동원”
독립운동 유공자 수 221명, 인구 규모로 서울의 1.6배
후세대 위해 독립 역사 교육…애국심 넘어 국민통합의 길
국가 차원 기념관 건립 필요…광복회도 적극 나서 큰 도움

같은 안동 김씨인 김옥균 선생의 서예 편액
같은 안동 김씨인 김옥균 선생의 서예 편액 '진충보국(盡忠報國·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쳐 충성을 다함)'을 배경으로 기념관 건립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는 김능진 위원장. 이무성 객원기자

대구는 명성황후 시해 후 최초로 앞장 서 정의를 외친 의병장 문석봉, 조선국권회복단 통령 윤상태, 대한광복회 지휘장 우재룡,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 중국 망명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 '광야'의 시인 이육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최연소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 중 순국한 구찬회…. 열거하기 숨찰 만큼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다.

만세운동이나 국채보상운동 주역 서상돈 선생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독립운동기념관 하나 없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역사의 현장 대구형무소 조사·연구서인 '묻힌 순국의 터, 대구형무소'(저자 정인열 전 매일신문 논설위원·현 대구가톨릭대 교수)를 통해 대구형무소 순국 독립유공자가 202명으로 서대문형무소보다 27명이나 많다는 사실도 이미 밝혀졌다.

김능진 대구독립운동기념관(이하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위원장(이하 위원장)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2세에게 가르치는 것은 의무"라며 "건립이 속도를 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애국심 함양을 넘어 후손교육과 국민통합 차원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리는 것 이상은 없다"고 강조했다.

-기념관 건립이 어떻게 추진되고 있나?

▶대구의 독립유공자는 2020년 기준 159명이다. 인구 규모로 보아 서울의 1.6배, 부산의 3배, 인천의 5배에 달한다. 지난 1일 합쳐진 군위군을 포함하면 221명이다. 어찌 독립운동의 성지가 아니겠나. 지난 2020년 첫 발을 뗐는데 아직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궁리를 하고 있다. 대구가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는 것 보다 더 한 자부심이 있을 수 없다. 시민들의 지원과 도움을 바탕으로 가시적 성과를 내기 위해 적극 움직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되지 않았나?

▶그렇다. 그래서 내심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다. 굉장히 낙관적으로 보았는데 변수가 생긴 모양이다.

-무슨 일인가?

▶어쩐 일인지 대통령 취임 이후 제외됐다. 짐작 가는 대목이 있기는 하다. 아무래도 예산이 수반되는 사안이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린 게 아닌가 싶다. 예산을 아끼겠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달 순 없겠지. 다만, 독립운동에 있어 대구의 상징성, 2세 교육, 국민통합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뒤로 밀리는 점은 이런 저런 걱정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추진할 계획인가?

▶사실 독립운동기념관은 국가(독립기념관)뿐 아니라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규모를 떠나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인구 200만 명이 넘는 지자체에 기념관이 없는 지역은 대구뿐이다. 국가 차원에서 건립하도록 다른 지자체들과 손잡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 가령 지자체가 50%를 내면 정부가 나머지 50%를 매칭하는 식으로 라도. 박물관의 경우 국립으로 전국 각 지역에 세워져 운영되고 있지 않나.

-정부와 국회의 적극성이 필요해 보이는 데.

▶그래서 관련 용역비 5억 원을 지난해 요청했었다. 그런데 전혀 반영이 안 됐다. 전국 어디에도 규모가 크든 작든 독립운동 흔적이 있다. 박물관처럼 기념관을 세워 역사를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교육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제가 독립기념관장으로 있을 때 하루에 예산을 500억원 넘게 따내기도 했는 데 쉽지 않다. 보훈처가 보훈부로 승격하기 직전 박민식 당시 처장(현 장관)을 만나 기념관을 국비로 건설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이 힘든 일에 뛰어든 이유가 있다면?

▶아, 코로나19 폭탄이 터진 2020년 시작됐다. 대구시민의 열화와 같은 한 마음이 토대가 됐다. 개인적으로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명색이 독립기념관장이었는데도 집안의 독립운동을 깊이 있게, 자세히는 몰랐다. 기념관 건립 운동을 본격화 하게 된 계기다.

김능진 위원장이 가족사진 앞에서
김능진 위원장이 가족사진 앞에서 '안동교회 111년사'에 수록된 조부 김병우 선생의 신앙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이무성 객원기자

김 위원장은 독립운동 명문가 후손이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독립유공자 김병우 선생의 손자이자 김재성 선생(대통령표창)의 조카, 류후직(애족장)의 처조카이다. 3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지만, 그는 집안사를 세세히 알지 못했다. 이유가 있었다. 의사로 이름을 날린 선친 김재명 선생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좌익계열 독립운동을 한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을 만든 서상락 열사를 숨겨주는 등 남몰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는 가족들이 염려하는 일이 될 수 밖에 없어 밝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김 위원장의 독립기념관장 취임 뒤 TV뉴스를 본 친구의 어머니가 "쟈, 아부지 내가 잘 안데이"라고 한 말을 전해들은 걸 계기로 온전하게 파악했다고 한다. 집안이 영남 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된 것은 당시 세브란스 의전에 재학 중이던 선친이 손바닥 크기의 종이에 독립선언문을 적어 안동으로 걸어 내려와 가슴에 품은 태극기와 함께 아버지에게 전하면서다. 화(禍)를 우려한 조부는 아들을 만주로 피신시켰다. 1919년 3월 18일 정오 김병우 선생을 비롯한 기독교인 30여 명이 안동 삼산동 곡물전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유림들이 합세했다. 안동 일원에서 14차례나 만세운동이 일어난 시발점이다. 3차 때는 30여 명이 사망하고, 약 50명이 부상을 입었다. 김 위원장은 인사 편중 논란에 시달리던 이명박 정부 때 집안의 독립운동 사실이 부각되면서 제9대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됐고, 재임 3년간 능력을 발휘해 광복회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기념관 건립에 광복회의 측면 지원이 필요하지 않겠나?

▶현재 부회장으로 있다. 회장이 이종찬 전 국회의원이신 데 깊이 교감하고 있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계신다. 문희갑 전 대구시장의 역할도 크다.

-근황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좌편향 되고, 역사를 왜곡하는 지난 광복회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국민을 실망시키는 광복회라면 존재 이유가 있을까. 더 내려갈 데 없는 곳까지 추락했으니 올라갈 만한 일만 남았다. 마지막 공적 자리를 맡았다고 다짐하며 열심히 돕고 있다. 짧은 시간 내 완전히 달라진 광복회의 면모를 보여 드리겠다.

-광복 78주년이 다가온다. 한일 간 풀어야 할 현안이 많은데 견해가 있다면.

▶한일 역전(逆轉) 시대다. 우리는 더 이상 일본에 꿀리는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거의 대부분 면에서 일본 보다 앞섰다. 좀 대범하게 나갔으면 한다. 친선은 도모하되 역사를 잊지 않으면 된다. 나고야대(大) 연구원으로 경험해보니 우리와 친구가 될 만한 선한 사람들도 많더라. 다만, 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광복회 부회장인 김능진 위원장은
광복회 부회장인 김능진 위원장은 "국민에게 걱정을 끼쳐온 광복회가 빠른 시일 내 달라진 면모를 보여주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무성 객원기자

◆김능진 위원장

대구가 고향으로 독립기념관장 재임 시절 '독립기념관장 김능진 충남대 교수'라고 소개하고는 했다. 교수 신분으로 있다가 '차출' 당해 제자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소속 대학을 향한 애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집안이 독립운동은 물론 신앙과 의료, 봉사의 길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경북부 첫 장로였고, 황무지 복음화의 일등공신이었다. 114년 역사의 안동교회 첫 예배자 8인 중 1명이다. 대구 동산병원 외과과장, 남산병원 원장으로 일한 선친은 조선 최고의 개복(開腹) 외과의였다. 아침 식사 전 3명을 수술하는 진기록을 세웠고, 평생 2만 명 이상 집도했다는 말씀을 직접 들었다고 김 위원장은 회고했다. 이후 애생원을 지어 한센병 환자 치료에 몸 바쳤다.

경북고와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 석·박사를 취득했다. 충남대·서울대에서 생산관리 등을 가르쳤다. 미국 위스콘신대(매디슨) 방문학자, 일본 나고야대 객원연구원, 전국 국립대 경영대학원장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그는 혁신의 전문가로 손꼽힌다. 충남대 기획조정처장이던 지난 2004년 충남대·충북대 통합의 큰 그림을 그려 성사를 눈앞에 두었다가 좌절했다. 뒤늦게 정부가 '글로컬대학30'에 승부수를 던진 걸 보면 통찰력이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충남대 교수 때 10개가 넘는 보직을 거쳤는데 김 위원장의 추진력과 조직 장악력을 지켜본 이들은 기념관 건립 추진의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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