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굳게 닫힌 정자의 문을 열자

16세 여고생·87세 할머니, 정자에서 이색 북토크 전시회
봉화에서 사라지는 정자 되살리는 '선케정' 캠페인 시작

배성훈 경북본사장
배성훈 경북본사장

추석 연휴의 한중간인 지난달 30일 봉화군 법전면 이오당(二吾堂)의 문이 활짝 열렸다. 오랫동안 문이 닫혔던 정자에서 16세 여고생과 86세 할머니가 함께 북토크 전시회를 열었다. 행사 후에는 27명의 선비들과 참가자들이 함께 짜장면을 먹는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안동·봉화 등 경북 북부에는 조금 과장하자면 한 집 건너 문화재다. 고택은 물론 정자 등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문화재로 지정된 전국 누정(누각과 정자) 총 290건 중 경북에만 102건이 밀집해 있다. 보물로 지정된 22건 가운데 9건을 경북이 보유하고 있다.

터 좋은 시골, 깊은 산속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정자는 쉼과 만남의 공간이다. 한국 정자는 자연적인 숲이나 주변 환경 요소를 자연적인 상태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의 외부 공간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주위의 풍경을 그대로 경관을 구성하는 재료로 활용하는 차경(借景)의 효과를 제대로 살리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자들은 '문화재'라는 이유로 엉덩이 한쪽 걸칠 수 없게 되어 있다. 정자의 소유권과 관리 주체가 개인이나 문중이어서 굳게 문을 닫고 있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더라도 관리 책임이 너무 크다. 개인이나 문중이 정자를 개방하기에는 파손, 화재 등 위험 부담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봉화군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정자를 보유하고 있다. 누각과 정자가 약 103동에 이르는 대한민국 누정 문화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군은 전통 누정의 가치를 알리고 보전하고자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많은 정자들은 문을 닫고 있고 오랜 세월 버텨온 정자들이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닫힘'과 '소멸'이라는 두 가지 위기를 맞고 있다.

경북 봉화군 법전면 이오당
경북 봉화군 법전면 이오당
경북 봉화군 춘양면 한수정
경북 봉화군 춘양면 한수정

이런 가운데 봉화에서 정자의 문을 열자는 작은 캠페인이 벌어져 주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캠페인의 시작은 올해 '선비의 케렌시아, 정자'를 발간한 16세 고교생에서 출발했다. 미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이재은은 외가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주말 여행을 다니며 정자를 탐구했다. 지난 8년간 봉화의 정자 중 8개의 정자를 선택해 86세 할머니는 그림을 그리고, 16세 외손주는 글을 썼다. 지난 8월에는 북토크 전시회를 통해 정자의 굳게 닫힌 문을 열자는 '선케정' 캠페인을 시작했다. '선케정'은 '선-선비의 꺾이지 않은 마음을 배우자! 케-나의 케렌시아(스페인어로 안식처, 피난처)를 찾아보자!! 정-우리 지역 정자를 살려내자'는 뜻이다.

이번 추석은 정자를 되살리려는 16세 청소년 작가에게 뜻깊은 한가위로 다가왔다. 이오당의 강필구 후손, 한수정(寒水亭·봉화군 춘양면)의 권갑섭 후손을 만나면서 '선케정' 캠페인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사라지는 정자의 문을 열어 살아 있는 마을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자 소유주인 후손들의 용기와 헌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오당 강필구 후손은 봉화군에서는 유일하게 매년 6월부터 9월까지 주말마다 정자를 개방하고 있다. 한수정의 권갑섭 후손은 문중을 설득해 지난 7월부터 한수정을 살아 있는 작은 도서관으로 변모시키는 비전을 실천하고 있다.

영남 선비들은 예로부터 정자를 마음으로 지었다. 영남 선비들이 지은 정자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정 출사의 꿈을 접고 종택 불천위 사당·재실·서원·정자를 지어 자신들만의 성리학적 공간을 구축했다. 정자는 풍류의 장이고, 정서적 휴식을 하는 공간이다. 정자의 문을 여는 '선케정' 캠페인은 단순히 건축물의 문을 여는 것을 넘어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정신의 문을 여는 일이다. 사라지는 정자를 마을 중심, 살아 있는 교육문화예술센터로 돌리는 작업이 지금 봉화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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