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단풍 드는 역순으로 망해가는 대학…풍자적 리얼리즘·해학적 담론에 담다

고광률 연작소설 ‘대학 1, 2’, 권한만 있고 책무는 사라진 우리네 교수사회 엿보기

대학 사회의 적나라한 실상을 재단과 교수를 중심으로 작품에 따라 하드보일드 하게, 때로 격정적으로 풀어낸 '대학 1, 2'
대학 사회의 적나라한 실상을 재단과 교수를 중심으로 작품에 따라 하드보일드 하게, 때로 격정적으로 풀어낸 '대학 1, 2'

◆벼랑 끝 상아탑 풍자‧해학으로 풀어내

벚꽃 피는 순으로 망해 가는 게 대학이라고 했다. 가을로 치자면 단풍 드는 역순으로 보면 되겠다. 그러나 작가 고광률은 이는 낭만적 언사라 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으나 죽음에 이르러선 그렇지 않듯이 대학이 사라질 때는 차례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대학의 적나라한 실상을 담은 소설이 수능과 지방대 살리기를 위한 '글로컬대(大)' 선정과 맞물려 주목받고 있다.

3년 전 철밥통 교수사회를 신랄하게 까발린 장편 '시일야방성대학'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상아탑(象牙塔)의 위기를 경고한 고 작가의 풍자적 리얼리즘과 해학적 비판을 담론 형식으로 다룬 연작소설 '대학 1, 2'(도서출판 바람꽃·각권 1만6천원)가 출간됐다.

한때 언론‧은행과 함께 절대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으로 불리던 대학은 어쩌다 절대절명의 생존 위기로 내몰렸을까? 진리 탐구와 지성의 산실로서 상아탑이라는 고고한 이미지의 아이콘이었던 캠퍼스는 이제 백척간두에 몰려 존망의 낭패감만이 가득하다. 인구 소멸이 가속화된 지방 소재 대학일수록 더욱 그렇고, 사실은 이미 적지 않은 대학이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다. 학령인구 탓을 하지만 실상은 사학 권력자들이 대학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부조리하게 구축한 내부 카르텔과 우리 사회 최고의 신분과 지위가 보장된 교수들이 연구자와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방기(放棄)한 채 권리와 이득만을 탐하고 취하며 안주해온 것 또한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대학'은 중편 4편에, 단편 6편을 담았다. 전작인 '시일야방성대학'이 통사라고 한다면 열전 형식이다. 역사서로 비유하자면 인물별‧사건별 서술 방식인 기전체를 택했다. 동일 인물이지만, 시제가 서로 어긋나는 작품이 더러 보인다. 몇 편은 작가가 일찌감치 '조광조, 너 그럴 줄 알았지'(2004년 발표한 중편)에서 선보인 바 있는 담론소설이다. 하나같이 학교법인 중일학원 중석대학교가 무대인데 개별 소설로서 완성된 작품이나 서로 유기적 상관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 전체로 보면 장대하고 웅장한 벽화를 감상하는 인상이다. '많이 배웠다는 자들이 교언영색으로 진리를 잡도리 질하고, 곡학아세로 권력에 아부하고, 조삼모사로 자기 이익을 찾는 기술이 놀랍다'로 축약되는 교수사회의 실체는 실로 요지경과 난맥상이라 할 수 있다.

고광률 작가는
고광률 작가는 "소설은 소설로 읽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오늘의 대학 현실이 오버랩되는 건 어쩌지 못하게 된다. 고광률 작가 제공

◆연구·교수·봉사는 헛구호…부조리 그 자체

단연 눈길을 끄는 소설이 표제작인 단편 '대학 1'의 '허틀러 행장기'와 중편 '대학 2'의 '잃어버린 정의를 찾아서'. 허틀러는 우여곡절 끝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된 전직 주류 중앙일간지 기자 출신이다. 뛰어난 로비 역량으로 실용문예창작학과 신설 인가를 받아냈고, 이 학과에서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면서 허삼락이라는 본명 대신 히틀러의 재림 격(格)인 허틀러로 불린다.

'벌건 대낮에 경량 칸막이가 벽인 연구실에서 순식간에 '뒤치기'를 당했다는 것인데…동물의 왕국도 아니고, 상아탑에서….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더랍니다. 묵시적 동의 없이는 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1권 216쪽)

행장기라는 제목에서 보듯 허틀러의 교통사고 사망 전 행적을 '개인비서이자 집사'인 강의전담교수 박박이라는 주인공이 화자가 되어 구술한다. '연구·교수·봉사'가 교수의 3대 역할이자 사명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허틀러, 그러나 사생활과 공적 활동은 이중적이다 못해 엽기적이었는데 박박의 고모도 엮여 기구한 농락을 당한다. 박박의 고모가 대학원생이 된 사연, 허틀러에 꼬임에 넘어가 줄 수 밖에 없었던 비하인드, 허틀러의 사고사에 얽힌 고모와의 관계 등이 밝혀지는 과정이 이 작품을 읽는 쏠쏠한 재미이자 '대학 1'의 백미인 데 반전이 극적이다.

'대학 2'의 중편 '잃어버린 정의를 찾아서'는 사익을 정의로 둔갑시킨 교수들의 조삼모사와 표리부동이 충격적이다. 사실과 정의를 밝힌다는 미명 아래 벌어지는 소송 교원들의 이기적 행태와 이에 맞선 법인 경영자의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격화소양(隔靴搔癢)식 대처, 그리고 그런 경영자의 눈을 가리는 아첨꾼들인 '십상시(十常侍)'의 신묘한 농단이 판소리 한마당인 양 걸판지고 생생하게 펼쳐진다.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난 금기태 명예 이사장은 부동산업과 금융대부업(사채)을 수익 사업으로 겸하는 노회한 경영주이다. 특히 절대복종을 신봉하는 군인정신을 '이데아요 절대 이성이요 물자체요 궁극의 절대가치'로 삼는 걍팍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 서정시를 사랑한다는 그는 교수들을 상대로 지적 감수성과 풍류를 과시하고, 이를 추종하는 척하는 아첨꾼 교수들은 그 그늘에서 작은 권한을 하사받아 아랫사람들을 무소불위와 안하무인격으로 다그치며 갑질을 한다. 결국 성과연봉제 도입으로 비롯된 불씨가 호봉제로 임용한 소송 교수들의 금전적 이해 관계로 옮겨 붙으면서 아수라가 돼 종말을 맞는다.

◆"잘났다는 지식인들 모여 양심 도덕 분탕질"

이 메일을 통해 만난 고 작가는 "대학사회에 있어 절대강자는 교수이다"라며 "지식은 자본과 권력을 올바로 이끌고 또 비판 견제해야 하는데 대학이 학벌중심체와 정실 관계로 편을 가르고, 사적 이해를 위해 곡학아세와 조삼모사로 양심과 도덕을 분탕질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고광률의 소설은 가상 세계 속 이야기이자 대학만의 일로 읽히지 않는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국문학으로 석사‧문예창작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단편 '어둠의 끝'(1987)과 '통증'(1991)을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소설집 '어떤 복수', '복만이의 화물차'가 있고, 장편소설로는 '오래된 뿔 1, 2', '뻐꾸기, 날다' '성자(聖者)의 전성시대' 가 있다. 권위를 바탕으로 사회 전반에서 부적절하고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언론이나 정치, 종교의 부조리를 주로 고발해왔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종격투기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주인공은 왜 한결같이 얻어터지기만 하나?

▶교수의 사회적 지위와 위상이 만만치 않은데, 대학사회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절대강자이다. 대학은 마치 인도의 신분계급처럼 신분과 계급 논리가 엄하게 작동하는 조직이다. 때문에 신분과 지위가 '을(乙)'에 해당하는 조교, 직원인 주인공이 부조리와 모순, 비논리와 비상식, 불합리와 불이익 등에 저항하는 건 마치 조선조 상놈이 양반에게 대드는 것 못지않게 녹록치 않다. 그래서 대다수가 침묵하고 복종한다. '대학 1, 2'의 주인공들은 이런 조직 문화와 논리에 순종(또는 순응)하지 않고 조리돌림 당하는 진실과 정의를 위해 나름대로 저항하려 하기 때문에 얻어터질 수밖에 없는 거다.

-포커스를 집요하게 모순과 부조리에 들이댄다. 왜 대학인가?

▶프랑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한 말인데, 세상의 작동원리는 자본·지식·권력이다. 자본과 권력을 비판 견제하여 옳은 길로 가도록 이끌어야 하는 게 지식의 역할이자 기능이다. 이 역할과 기능을 수행해야 할 책무를 가진 최상위 기관이 대학이다. 지식이 학벌로 왜곡되고, 곡학아세하여 양심과 도덕을 분탕질했다. 지식권력이 자본권력과 정치권력에 종속되어 그릇된 경제공학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탈선'시키고, 정치공학(또는 기술로)으로 민주주의를 변질·오염시키는 일에 앞잡이 노릇을 했다. 공명과 사익만 챙길 줄 알지 무능하고 사악한 폴리페서들을 떠올리면 된다. 때문에 부조리와 모순의 근원이자 책임으로부터 대학이 자유로울 수 없다고 봤다. 지식인이 저지르는 위선과 해악을 말하고자 한 것인데, 그 '잘 났다는' 지식인들이 대거 모여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이 대학이라 어쩌지 못하고 대학을 무대로 삼게 된 거다.

-책머리에 주요 인물에 대한 설명을 달아 붙였는데?

▶세상은 특정 주체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 세상은 있을 수도, 혹 있더라도 굴러가지 못할 거다. 주체와 객체, 객체와 주체 간의 균형 잡힌 유기적 관계 속에서 공동체가 작동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세상은 내 뜻과 행위대로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 한 사람의 시각이나 행동을 좇는 서사는 가능한 한 만들지 않는다. 등장인물이 많고 다양한 이유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등장인물 리스트를 달고, 이름 또한 언행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비유적·상징적으로 지으려 노력한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생생하다. 교수로서 부담은 없나?

▶소설가 고원정은 저를 향해 말하길 '강한 자의 속옷을 드러내 보여줄 뿐 아니라, 약자인 '나'와 '우리'의 때 묻은 '빤스'까지 주저 없이 보여'주는 '독한 리얼리스트'라고 했다. 나는 삶과 예술이 하나라고 믿는다. 삶은 속되고 예술은 귀하다고? 그렇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풍자적 리얼리즘과 해학을 추구한다. 내 창작의 힘은 견딜 수 없이 뻔뻔하고 당당한 부조리와 모순의 난무에 대한 분노와 고발에 있다. 그러니 사실성을 담보한 서사와 묘사가 중요해진다. 책에서 수차례 밝혔지만 나는 소설을 쓴 것이지, 논픽션(또는 르포)을 기록한 게 아니다. 소설은 소설로 읽혀야 마땅하다. 나는 전업 작가가 아니다. 자연인 고광률, 교직원(校職員) 고광률, 교수 고광률, 작가 고광률이 각각 존재한다. 자연인이자, 작가 고광률로서 쓴 소설을 교직원(敎職員)의 르포로 읽는다면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은 지성인들의 공동체다. 사실과 허구를 혼동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집필 마무리 단계"

-인파이터다. 체력적으로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나이인데 어떻게 해마다 한 권씩 소설을 짓고 있나?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게 하루 24시간이다. 남들처럼 8시간 일하고, 8시간 자고, 8시간 자유를 갖는다. 그 8시간의 자유를 글 쓰는 일에 온전히 바친다. 나도 힘들고 불만인데, 흙 수저로 태어났으나, '불행히도' 분노와 타협할 뜻이 없고 또 작가의 꿈을 버리지 못하겠으니 어쩌겠나. 또 글 쓰는 일이 특별하면 얼마나 특별하겠나. 시간이 나면 자판을 두드린다. 작가로서의 '폼'이 나지 않는 게 흠이다. 하하. 그냥 삶의 일부이고, 밥 먹고 똥을 싸야 한다면, 글도 써야 한다는 생각이다. 안 그랬으면 책상에 앉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사교와 대인관계는 엉망이다. 삶이 폭풍 속을 나는 연(鳶)이고, 고립된 섬이다. 자초한 일이니 감당하면 산다.

-서사가 대체로 슈퍼 갑(甲) 대(對) 을(乙)도 아닌 병(丙)의 구조다.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는 안 줄 건가?

▶예전에는 사회구조가 '갑-을-병'이었다면, 지금은 '갑-병'의 구조이다. 을이 사라졌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가 지배~종속으로 작동하는 건 분명한 사실 아닌가. 저는 현실주의자라서 그런지 지배자가 철저하고 효율적으로 피지배자들을 지배하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피지배자가 부당한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그게 서로의 몫이다. 그런데 어디 그런가. 작금의 세상을 보라. 분노와 저항이 아니라 잘 보여서(굴종해서, 더 나아가 아첨을 해서) 다른 경쟁 관계에 있는 종속자 보다 더 얻어내려고 지배자에게 맹종하고 종속자 끼리 반목·대립하며 지배 논리를 떠 받들지 않는가. 내 소설의 희망은 지배와 종속 간의 균형에 있고, 병이 갑이 아닌 을의 편에 설 수 있는, 그리하여 갑과 을의 균형을 이루는 역할 복원에 있다. 니체 식으로 말하면 병과 을의 주인정신 회복이다. 희망이나 비전은 작가가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내놓는 게 아니라, 독자가 소설 속에서 제기한 문제들 가운데 찾아야 할 몫이다. 세상에 정답은 없으며 각각의 답들이 있을 뿐이다. 소설 속 신기루는 희망이 아니다. 희망의 메시지를 찾으면 세상을 살아갈 테고, 못 찾으면 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포기하면 살아지는 삶을 살아갈 거다.

이 지독한 리얼리스트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마무리하는 대로 2차 단종 복위사건을 다룬 소설 집필에 들어가겠다는 의욕을 감추지 않았다. 고광률 작가 제공
이 지독한 리얼리스트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마무리하는 대로 2차 단종 복위사건을 다룬 소설 집필에 들어가겠다는 의욕을 감추지 않았다. 고광률 작가 제공

-다음 작품을 귀띔해 달라.

▶지금은 한국전쟁 초기에 자행된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다룬 장편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다들 한국전쟁을 쳐다보지 않는지라 다루게 된 거다. 내년 초에는 조선조 2차 단종 복위사건이라 할 금성대군의 정축지변(丁丑之變)을 청소년 소설 형식으로 접근해 보려 한다. 그래서 공부 중인데, 570여 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살아서 나라를 움직이고 있는 수양대군과 한명회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고,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말마따나 지금 이 순간의 판단과 행위가 얼마나 중요하고 영원한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다시금 뼈저리게 알게 됐다. 또 끝나지 않은, 끝나지 않을 참담한 세상과 씨름을 해야 하나…. 그런데 힘이 솟는다.

김우승 글로컬대학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6월 20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글로컬대학 예비지정 결과를 발표를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 글로컬대학위원회는 연세대 미래캠퍼스와 포항공대 등 15개 대학(공동신청 대학 포함 19곳)을 '글로컬대학'사업에 예비 선정했다. 앞서 교육부는 학령인구 감소와 급격한 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할 지역 대학인 글로컬 대학을 뽑아 5년간 1천억원씩 지원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고 최종적으로 안동대 등 10곳이 선정됐다. 연합뉴스
김우승 글로컬대학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6월 20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글로컬대학 예비지정 결과를 발표를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 글로컬대학위원회는 연세대 미래캠퍼스와 포항공대 등 15개 대학(공동신청 대학 포함 19곳)을 '글로컬대학'사업에 예비 선정했다. 앞서 교육부는 학령인구 감소와 급격한 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할 지역 대학인 글로컬 대학을 뽑아 5년간 1천억원씩 지원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고 최종적으로 안동대 등 10곳이 선정됐다. 연합뉴스

◆안동대 글로컬대 선정 시사점은 혁신

종이를 사랑하는 이들, 특히 수능을 마치고 대학이나 학과 선택, 아니 진학 자체를 고민 중인 예비 대학생들이 부모님과 함께 펼쳐볼만한 책이다. 가상현실이라고 편안하게 여기며 읽어나가다 보면 진로 선택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재미있다. 페이지가 바쁘게 넘어간다. '시골구석에 처박힌 지잡대' 같은 표현에서 자조감을 느끼게 하는 작가의 리얼리티가 빼어나다. 지방 국립대라고 예외일까. 작가의 특장으로 꼽히는 특유의 입담에 빠져 책 속에 몸을 풍덩 담그면 현실인지 허구인지 구분이 어려울 만큼 뛰어난 사실적 묘사와 설명에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네플릭스 드라마나 TV 시리즈 원작으로도 제격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글로컬대 관련이다. 이 사업은 윤석열 정부가 혁신에 나서는 지방대 10곳을 선정해 5년간 1천억 원을 지원하는 게 핵심이다. 지방대 살리기 정책이 비로소 닻을 올린 셈인데 안동대의 결실이 두드러진다. 안동대는 경북도립대와 손잡고 인문학을 중점 분야로 삼아 융복합 인재 양성 청사진을 내놓았다. 또 국공립대 및 경북 7개 교육 연구기관 통합 운영을 내세워 높은 점수를 받았다. 위험은 곧 기회(위기)라고 했던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일로 삼을만한 모범적 사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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