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멸칭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중국인들은 명나라 만력제(신종)를 암군으로 평가한다.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을 도우면서 정작 명나라를 위태롭게 한 탓이다. 그의 38년 치세를 치욕으로 여긴 홍위병들은 그가 죽고 300년 뒤 능을 파헤쳐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에게 내린 중국인들의 멸칭은 '조선황제' '고려천자'였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백잔(百殘)'은 백제의 잔당, 요즘 말로 하면 '찌끄레기 백제 것들' 정도가 된다. 낮잡아 쓰는 표현이 공문서에 해당하는 비석에 새겨진 것이었다. 멸칭은 발화와 동시에 미묘하나마 경멸의 색채를 표정에 묻히기 마련이다. 중국인 앞에서 '짱깨', 일본인 앞에서 '쪽바리'라 할 때는 된통 맞아도 괜찮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음식에 대한 멸칭도 있다. 프랑스어 'chaussette(쇼셰트)'는 아메리카노를 가리킨다. '양말 빤 물'로 풀이한다. 음식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미국을 깔보는 심리와 결합한 것으로 풀이한다. 사회 지도층이라는 특정 직군을 싸잡아 폄하하는 것도 비슷하다. 소위 '사' 자가 붙는 검사, 판사, 의사에 접미사 '-새'를 대신 붙여 낮잡는 조어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의 '의사'라는 발음이 '의새'로 들리면서 논란이 일었다. "독일, 프랑스, 일본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동안 의새들이 반대하며 집단행동을 한 일은 없다"였다. '의대 정원'에 이어 '의사'라는 표현이 뒤이어 나오자 모음조화를 지키려던 말실수라는 옹호도 있다. 반면 아나운서 뺨치게 전달력이 좋은데 실수라 보기 어렵다는 반박도 있다. 피곤해서 나온 말실수라고 정부는 일축했지만 정·의 갈등이 정점에 이른 때 나온 실언임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이에 대한 모든 공세적 에너지 소모는 환자들 앞에서 무의미하다.

바이럴 마케팅의 최고 효과는 식도락 분야가 아닌, 의술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죽어가는 사람 살렸다는 입소문은 어떤 말보다 빠르다. '명의'라는 예칭은 언론이 만드는 게 아니다. 사람 잘 안 변한다지만 죽다 살아난 사람은 변한다. 그들은 거칠 게 없어, 살리는 능력을 발휘한 이를 '참의사' '의느님'이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대형 병원의 업무 차질이 길어지려 한다. 치료를 받아본 경험자의 세설이 갈 곳을 잃었다. 환자들이 의사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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