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미국은 패권적 지위를 결코 평화롭게 양보하지 않는다

이춘근 국제정치학자
이춘근 국제정치학자

대한민국은 지구 최악의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는 나라다. 지난 150년 이상 한반도 주변 나라들은 모두가 세계적인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는 나라였고 그들의 힘이 충돌하는 장소는 언제라도 한반도였다.

청나라와 일본의 싸움인 청일전쟁, 러시아와 일본의 싸움인 러일전쟁 그리고 미소 냉전(冷戰) 당시 벌어졌던 몇 안 되는 열전(熱戰)인 한국전쟁도 전쟁터는 오로지 한반도였다. 1950년대 초반, 세계의 강대국들이 모두 한국전쟁에 첨전해서 3년 동안 밀고 밀리는 판에 작은 한반도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라도 주변 국가들의 힘의 관계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였다. 누가 진정 우리의 안전과 독립에 유용한 나라인지, 주변 국가들 간 힘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 언제라도 정확한 파악이 필수인 나라였다.

우리나라는 우리의 힘이 주변 강대국의 힘을 초월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나라가 되든가, 혹은 적어도 주변 강대국들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소위 '국제정치적인 줄서기'에 능란해야만 하는 나라다. 지정학이 변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국제정치적 줄서기는 과거에도 중요했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할 것이다.

조선의 왕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아야 했던 삼전도(三顚倒)의 굴욕, 궁궐에서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왕비가 살해당하는 치욕은 사실상 국제정치적인 줄서기를 잘못했던 결과라고 보아도 될 슬픈 사건들이었다.

당대 최고의 국제정치학적 식견을 가졌고, 외교의 신이라는 별명까지 가졌던 이승만 박사는 역시 대한민국의 존재에 가장 유용한 나라는 미국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한미동맹이라는 기적 같은 안전장치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 미국의 군부는 한국과의 동맹 체결을 강하게 반대했고, 국무부 역시 한국과의 동맹 체결 반대가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는 날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을 향해 '이 동맹 때문에 우리나라는 두고두고 덕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에 전쟁이 없었고, 한국이 경제발전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은 한미동맹이었고 이승만 박사의 탁월한 국제정치적인 줄서기의 산물이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미국의 시대는 지나갔고 중국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국제정치적 견해가 대유행을 했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경이적으로 바라다보는 사람들은 이제 곧 중국은 미국을 대체할 강대국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2008년 가을 뉴욕의 월스트리트가 붕괴되었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 압도적 다수가 미국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중국의 시대가 다가올 가능성은 별로 없고 미국의 시대는 앞으로 100년도 더 갈 것이라고 주장했던 필자는 완전히 외로운 극소수였을 뿐이다.

그무렵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9~10%에 이르렀고,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3% 정도였으니 앞으로 30년 정도면 미국과 중국의 GDP는 같은 수준이 될 것이며, 그 이후 세계는 중국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성행했다. 그 결과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었고, 이명박 정부는 '중국은 전략적 협력동반자'라고 말했으며, 박근혜 정부에서는 '미중 등거리 외교'라는 개념도 나왔다. 문재인 정부는 중국은 태산, 한국은 동산이라는 언급을 넘어 중국몽을 같이한다는 망발도 나왔다.

지난 정부들은 역사상 어떤 패권국도 평화롭게 자신의 패권적 지위를 도전자에게 양보한 적이 없었다는 역사적 진리를 무시했다. 강대국의 파워 게임을 운동경기처럼 페어플레이로 착각했다. 미국은 중국이 더욱 막강해지기 이전, 경제력을 꺾어놓겠다는 대전략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시작했고 바이든이 이어받았다. 이제 중국이 미국을 앞서는 패권국이 될 것이라는 주장은 별로 없다. 이제 우리는 중국이 차세대 세계 패권국이 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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