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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43>중국어 역관이자 금석학자 오경석의 매화도

미술사 연구자

오경석(1831-1879), '홍매', 종이에 담채, 16.3×45.4㎝, 개인 소장
오경석(1831-1879), '홍매', 종이에 담채, 16.3×45.4㎝, 개인 소장

중국어 역관인 오경석은 개화사상가, 서화수집가, 금석학자다. 20대 때부터 사신단을 수행하기 시작해 12차례나 북경을 다녀왔다. 나라 밖을 자주 왕래하며 청나라 상황을 빠르게 접해 국제정세에 밝았던 그는 친구 유대치, 아들 오세창을 비롯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젊은 세대에게 개화의 필요성을 알렸다. 그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 전각가, 미술사학자인 오세창이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선각자다.

중국 소식통이었으므로 자연히 김정희, 이하응, 박규수 등 고위층과 접촉이 많았다. 김정희의 '완당전집'에 오경석에게 보낸 편지 4통이 실려 있다. 김정희는 45년 아래인 후배 금석학자 오경석에게 타고난 총명을 더욱 확충해 9천999분에 도달하더라도 나머지 1분을 위해 끝까지 노력하라고 격려한다. 대단한 인정이다.

오경석은 한중 문화교류를 풍성하게 한 매개자이자 당사자다. 당시 첨단 학문은 금석학이었다. 오경석은 서화도 모았지만 금석문 탁본 수집에 더욱 공을 들여 수백 종을 사들이며 연구했다.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결과 신라와 고려의 금석자료 146종을 모아 고증한 '삼한금석록'(1858년)을 펴내는 업적을 이뤘다.

금석학자답게 예서, 전서를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다. 오경석은 청나라풍 매화도 그렸고, 이 '홍매'처럼 매화도의 대가 조희룡의 화풍도 소화했다. 힘차게 뻗은 줄기와 가지에 붉은 꽃이 풍성한 노매다. 둥글게 휘어진 굵은 둥치의 일부를 눈앞으로 바싹 당겨와 부채꼴 화면을 꽉 채웠다.

선면은 표면을 특수하게 가공한 매끄러운 종이다. 수분을 다 흡수하지 않는 바탕 종이의 특징을 먹과 채색의 엷고 맑은 효과로 활용했다. 동글동글한 매화 꽃잎은 붓의 물기가 표면에서 미끄러져 한군데로 쏠리며 생긴 농담으로 인해 자연스러운 입체감을 준다. 노매의 굴곡과 요철을 나타낸 태점, 홍매의 꽃받침과 화심으로 찍은 분방한 점들이 활기를 더한다.

그림 외에는 작은 인장 '역매백전(亦梅白牋)' 하나뿐이다. '나도 매화도인'이라는 오경석의 호 역매는 중국 원4대가인 오진의 호 매화도인(梅花道人)에서 따왔다. 당호 천죽재도 오진의 묵죽이 '천죽', 곧 하늘이 내린 대나무로 칭송받은 데서 따왔을 정도로 오경석은 오진을 좋아했다. 외아들인 오세창은 이 집을 물려받아 살며 '천죽재이세거(天竹齋二世居)'로 인장을 새겨 아버지를 기렸다.

백전은 '아뢰는 글'이라는 뜻으로 편지글에 찍는 서간인(書簡印)의 문구다. 이 인장으로 인해 오경석이 누군가에게 안부를 여쭈며 그림편지처럼 동봉한 부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냥 부채가 아니라 자신의 그림이 들어간 그림부채 선물이어서 받은 분은 더욱 흐뭇했을 것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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