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르포] “쓰는 거라 절대 버리면 안돼요”…저장강박증 가구 방문해보니

집 안 곳곳 '쓰레기 탑' 쌓여있어...사람 어깨높이 달해
치우려는 활동가와 집주인 마찰 빚어지기도
"집 치우기는 물론 정신과 치료까지 이어져야"

지난달 20일 오전 10시쯤 대구 달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대구달서행복지역자활센터 활동가들이 저장강박증 가구의 집을 치우고 있다. 정두나 수습기자
지난달 20일 오전 10시쯤 대구 달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대구달서행복지역자활센터 활동가들이 저장강박증 가구의 집을 치우고 있다. 정두나 수습기자

지난달 20일 오전 10시쯤 찾은 대구 달서구의 한 아파트. 문을 열자마자 코끝으로 쉰내가 가득 풍겨왔다. 입구부터 거실까지 향하는 약 5m 길이의 복도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틈을 남겨두고, 택배 박스와 각종 페트병, 스티로폼 등이 곧 무너질 것처럼 쌓여있었다. 허리 높이로 있던 쓰레기 더미는 거실에 다다르자 어깨보다 더 높아져 방을 가득 메운 상태였다.

원래 상아색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바닥은 온통 노란빛을 띄고 있었고, 그 위로 옷가지와 이불, 각종 충전기와 전선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새까만 먼지가 바닥 곳곳에 들러붙어 있어 신발을 신은 발을 내딛기도 꺼려졌지만, 이날 집주인은 혼자 맨발로 집 안 곳곳을 배회했다.

부엌은 이미 오래전 제 기능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는 식기가 싱크대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릇 안에는 초록빛의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냉장고 안에는 먼지가 쌓인 반찬통이 서너 개 들어있었지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없어 보였다.

대구달서행복지역자활센터에서 나온 활동가 8명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주황색 마대가 담긴 75ℓ 종량제 봉투에 눈에 보이는 대로 쓰레기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쓰레기 틈새 사이로 진한 악취가 새어 나왔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화장실 배수구의 경우 머리카락과 오물이 잔뜩 엉긴 덩어리가 세 주먹이나 쏟아지기도 했다.

두 달 동안의 질긴 설득 끝에 시작한 청소였지만 당일에도 집주인과의 마찰은 계속됐다. 한 활동가가 빛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짐들이 쌓여있던 방을 치우려고 하자 집주인이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막아선 것이다. 그는 "버리면 안 되는 물건들을 아이 방에 모아둔 거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이가 불편해 할 것이라는 충고도 그의 마음을 돌릴 순 없었다.

활동가 김진희(62) 씨는 "집주인이 있으니 제대로 치우기가 어렵다. 이러면 금방 다시 집이 원상복구될 것 같아 걱정스럽다"며 "그래도 이 집은 다른 집들에 비해 나은 편이다. 훨씬 심각한 집이 많고, 짐을 치우겠다고 약속하더라도 막상 우리가 방문하면 문전 박대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날 활동가들은 1시간 30분 동안 거실, 주방, 베란다 등을 치웠고 대형 쓰레기봉투 22개를 가득 채웠다. 거실에 있던 TV 주변의 잡동사니와 방 하나를 치우지 못했지만 집은 전체적으로 깔끔해진 느낌이었다. 집주인 역시 환해진 집을 보며 "내심 후련하다. 지금껏 어쩔 줄 몰라 방치하고 있었는데 치워서 다행"이라고 하기도 했다.

서지연 대구달서행복지역자활센터 팀장은 "저장강박 의심 가구는 생각보다 주위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관련 예산과 지원이 부족해 드러난 사례도 제대로 관리 못하는 것이 현 실정"이라며 "'자기 집은 자기가 치워야 한다'라고 다들 생각하니 예산 증액도 어렵다. 집 치우기는 물론 정신과 치료까지 이어져야 저장강박증 가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20일 대구달서행복지역자활센터 활동가들이 방문한 저장강박증 가구의 모습. 정두나 수습기자
지난달 20일 대구달서행복지역자활센터 활동가들이 방문한 저장강박증 가구의 모습. 정두나 수습기자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