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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습니다] "술값 낼 형편 안 되면 술자리 끼지 마라"…떳떳하게 살라는 아버지 말씀

장삼철 (주)삼건물류 대표의 아버지 고(故) 장영호 씨

1994년 여름 경북 의성군 빙계계곡에서 찍은 부모님 사진. 장삼철 씨 제공
1994년 여름 경북 의성군 빙계계곡에서 찍은 부모님 사진. 장삼철 씨 제공

아버지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도 벌써 2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곳에서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어머니께서도 얼마 전, 92세 생신을 넘기시고 아버님 곁으로 떠났습니다. 우리 5남매는 모두 아프지 않고 의좋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협심증으로 50대 중반에 쓰러지셨습니다. 언제 재발할지 조마조마한 삶을 이어 가시다가 1998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돌아가시는 날 새 경운기를 사서 마당에 몰아놓으셨던 걸 보면 사람의 운명이란 참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가 힘든 일인가 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가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전라도로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생전에 군 생활을 대신했던 무주군 무풍지서를 꼭 한번 가고 싶어 했습니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아버지는 겨우 스무 살로 피난지였던 영천 신녕 갱빈에서 긴급 순경 특채에 지원했다고 합니다.

높은 산들로 둘러쌓인 조그마한 무풍지서에서의 생활은 몹시 공포스러웠다고 합니다. 산등성이 너머에서는 북소리, 꽹과리소리, 고함소리 등 빨치산들이 세를 과시하는 소리가 수시로 들렸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무풍지서 인근 민가에서 하숙을 했다고 합니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아버지보다 한두 살 많은 새댁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나이 많은 남자한테 시집을 와 고생하는 모습이 여간 안쓰럽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편은 집안일은 돌보지 않고 노름에 빠져 밖으로 돌았다고, 괘씸해서 동료 경찰에게 '혼을 내주라'고 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실제로 노름판에서 경찰에 단속돼 몽둥이찜질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천에서 지례를 지나 도 경계 재를 넘어 무풍면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하숙집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하숙집 아주머니는 45년 만에 상봉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달 만한 키의 평범한 할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약간 긴장을 하는 듯 했지만 이내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늘 참하다고 자랑을 하던 연적(?)이 만만하게 보였던 탓이리라. 그날은 진안읍 여인숙에서 여장을 풀고 다음 날 마이산을 관광했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처음 한 뜻깊은 여행으로 기억됩니다.

아버지는 평생 시골에서 살았지만 여느 촌로와는 다른 분이었습니다. 학식이 있었고 주관도 뚜렷해서 운명에 순응하는 소극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30대 중반에 논밭을 다 팔아 방앗간을 열었습니다. 떡, 고춧가루, 국수, 목화솜 트는 기계까지 갖춘 꾀 큰 규모의 방앗간이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5남매는 어릴 때부터 감나무 아래 빙 둘러앉아 돼지고기를 구워 먹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술도 샀으면 샀지 절대 얻어 마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술값 낼 형편이 안 되거든 술자리에 끼지 마라!" 하셨습니다. 떳떳하게 살라는 뜻이리라.

5남매 중 유난히 튀는 삶으로 실패를 거듭하던 나에게는 늘 안타까운 눈길이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직격탄을 맞고 처자식을 데리고 찾아뵈었을 때는 그 무뚝뚝하던 분이 "죽으란 법은 없다. 무슨 구처가 있을 끼다!"라며 위로를 해 주셨다. 무엇보다 일당 일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갈 때 돌아가셔서 늘 죄스런 마음입니다. "아버지, 저는 해냈습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남을 배려하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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