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컨텐츠가 다양한 데 비해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다. 그저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스런 항복을 했다는 사실 외에 병자호란의 발발 원인은 무엇이고, 경과는 어떻게 되었으며, 그 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해주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52일 만에 항복, 치욕스런 전쟁
병자호란은 전쟁 기간이 1637년 1월 3일부터 2월 24일까지 불과 52일에 불과했고, 국왕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임진왜란의 7년 전쟁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전쟁 기간이 짧다. 전쟁 개시 불과 52일 만에 항복했다는 것이 사실 믿기지 않는다.
만주 일대에 거주하며 말갈족으로 불렸던 여진족은 금나라·청나라 등 대제국을 두 번이나 수립한 위대한 민족이다. 만주 일대와 중국 북부를 통치하는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금나라는 1234년 칭기스칸에게 멸망 당했다. 한족(漢族)이 세운 명나라는 이들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 찢어 분할통치(devide and rule)했다.
여진족은 압록강 두만강 유역 일대에서 조선인과 섞여 살았다. 이성계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릴 때 여진족의 힘을 빌렸다. 조선 개국공신에 오른 이지란은 북청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진족 족장이었는데, 그의 여진 이름은 퉁두란이다. 조선에 거주했던 여진족 중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은 연산군 시절 왕실 호위대장에 오른 동청례(童淸禮) 장군이다. 명나라에 눌려 지내던 여진족이 동아시아 정세에 파란을 일으킨 것은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 덕분이다. 그는 무예도 뛰어났지만, 상재(商材)에도 밝은 지도자였다.
조선 인삼이 중국에서 비싼 값에 거래되자 누르하치는 조선 인삼 씨앗을 구해 백두산 일대에서 재배하여 명나라로 수출했다. 이를 위해 휘하에 1만여 명의 심마니 부대를 운영했다. 모피 무역에도 뛰어들어 명나라 은의 25%가 누르하치에게 흘러갔다. 누르하치는 이 돈으로 신무기를 구입하여 여진족을 통일했고, 1616년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후금(後金)을 창업했다.
누르하치가 만주에서 세력을 키우자 명나라는 광해군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한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사령관으로 하여 1만 3천 명 병력을 만주에 파병하면서 중립을 지키다 우세한 쪽에 붙으라는 밀명을 내린다.
◆뛰어난 지도자 누르하치
1619년(광해군 11) 3월 만주 사르후(薩爾滸)에서 누르하치군(6만명)과 명·조선 연합군(10만명)이 격돌했다. 전세가 후금 쪽에 유리하게 기울자 강홍립은 싸우다 말고 조직적으로 투항한다. 전투는 누르하치군의 대승으로 끝났고, 후금은 만주 패권을 차지한다.
누르하치는 열린 의식을 가진 지도자였다. 인구 부족으로 곤란을 겪던 누르하치는 투항해 온 조선 병사들을 극진히 예우하여 팔기군으로 정착시켰다. 또 기술자·장인 집단을 우대했다. 이렇게 되자 조선에서 천민 취급받던 장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누루하치에게 귀순하여 예우를 받아가며 무기를 만들고 갑옷을 생산했다. 카스트 제도나 다름없었던 조선의 신분·계급 차별이 낳은 업보다.
광해군은 조선의 국왕 중 예외적으로 부국강병을 지향했고, 자주적 실리외교를 추구한 군주였다. 그는 대륙의 명·청 교체기에 노련한 외교를 펼쳐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사르후 전투 4년 후인 1623년 서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 정권이 출범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사대하지 않고 오랑캐 여진족 추장과 비밀 거래를 했다는 것이었다.
외교의 달인 광해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인조 정권은 광해군과는 정반대 행보를 시작했다. 떠오르는 태양 후금을 적대하고, 지는 해 명나라를 섬기는 시대착오적 외교의 결과는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7) 침략이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 즉위식을 망친 조선 사신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홍타이지는 1636년 4월, 만주 선양(瀋陽)에서 청나라를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청 태종이 되었다. 이때 즉위식에 참여했던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우리에게 황제는 명나라 천자(天子) 한 사람뿐"이라며 끝까지 배례를 거부하여 즉위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그들은 청 태종의 국서도 팽개치고 귀국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즉위식에 재를 뿌린 조선의 무례와 치욕을 잊지 않았다. 만주팔기 기마대가 전격전을 벌이기 위해 결빙기까지 8개월을 기다린다. 1637년 1월 강이 얼어붙자 조선을 응징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병자호란의 발발이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서울을 탈출하여 강화도로 피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울 포위 작전을 구사했다. 로오사 선봉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돌파한 지 6일 후 무악재에 나타났다. 오랑캐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마보다 사흘 먼저 서울에 들이닥친 것이다. 강화로 가는 피난길이 봉쇄되자 인조는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농성에 돌입했다.
이때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 진영에서 천연두가 발병하여 난리가 났다. 하루빨리 출병 목적을 달성하고 철수해야 할 상황이 된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항복하면 조건 없이 철군하겠다"라는 유화적 조건을 제시한다. 대신들은 항복하여 백성들 살리자는 화친파(최명길)와 전 백성이 다 죽을 때까지 오랑캐와 싸워자는 주전파(김상헌)로 갈렸다.
인조는 화친의 길을 택한다. 항복 반대 단식투쟁을 벌이던 김상헌은 국왕이 항복을 결정하자 자살한다며 목을 맸으나 가족에게 발각돼 살아났다. 그 길로 김상헌은 고향 경북 안동으로 낙향 은거했다. 1637년 2월 24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삼궤구고두례) 항복 의식을 거행한다. 이로써 지난해 엉망이 되었던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이 완결되었다.
항복한 조선 입장에서 보면 국왕이 오랑캐 추장에게 머리를 조아린 희대의 치욕이었다. 그 결과 인조실록은 삼전도 굴욕을 "정축년에 국왕이 남한산성에서 나왔다"라는 의미에서 '정축하성(丁丑下城)'으로 용어를 세탁했다. 청나라는 철수 과정에서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다. 야사에는 포로 숫자가 50만이라고 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5만~10만 명으로 추산한다.
광해군은 실리외교로 파국을 피했지만 인조반정 세력은 초지일관 친명, 오랑캐 배척 외교를 고집하다 전쟁을 자초했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 실패는 국가 패망의 지름길이란 교훈을 전해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병자호란이다.
청나라의 다음 목표는 중국 대륙 장악이었다. 그들은 명나라 공격을 위해 인조에게 조선군 파병을 요구한다. 김상헌은 이를 거부하라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괘씸죄에 걸린 김상헌은 1640년 선양으로 압송된다. 칠순 노구의 김상헌은 고국을 떠나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는 시를 남겼다. 이 시가 한 시절 교과서에도 실렸다.
청나라의 압력에 굴복한 조선 조정은 1640년 4월 임경업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여 전선 120척과 포수 4천 명, 사수 1천명, 수군(格軍) 1,300명을 파병했다. 이들이 청군에 소속되어 명나라 공격에 합류했다.
◆명나라 멸망에 일조한 조선인들
1644년 청나라 군대는 산하이관(山海關)을 돌파하여 명나라를 무너뜨렸다. 이때 청군은 병력이 15만에 불과했다. 소수의 청나라 군대가 명나라를 무너뜨린 원동력은 첨단 군사기술을 적극 수용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외부 세력을 수용함으로써 팔기군을 무적의 군대로 키워냈기 때문이다.
이때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청나라 원정군에 참여했다. 청나라 정예부대인 팔기군에는 투항해 온 조선인으로 구성된 '고려 니루'를 편성했는데, '고려 니루'도 청군을 도와 명나라 멸망에 일조했다. 산하이관 전투는 한반도 군대가 베이징에 진입하여 중국 왕조 멸망에 일조한 최초의 사건이다. 국사학계는 이처럼 기념비적인 대사건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들 머릿속에는 소중화 조선이 오랑캐 편에 붙어 명나라를 무너뜨린 것은 씻을 수 없는 불경이란 소중화 사대주의 덕분이 아닐까?
선양으로 끌려갔던 김상헌은 청이 대륙을 차지한 다음해인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다. 이후 김상헌은 효종 시절 북벌의 기운을 타고 영웅이 되었고,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와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은 역적 집안으로 전락했다.
이후 안동 김씨 김상헌 집안에서 13명의 재상과 판서(장관)·참판(차관)이 줄줄이 배출됐고, 순조비·헌종비·철종비 등 왕비 3명, 숙종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나라가 망하든 말든, 백성이 죽어나든 말든 애오라지 주전론을 외친 덕분에 김상헌 가문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주인공으로 오래도록 꿀단지를 빨았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는 여진족이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적나라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서양 선교사 아담 샬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가 1645년 귀국했을 때는 당대 최고의 개화 지식인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인조는 개화 지식인이자 청나라 황실과 두터운 인맥을 확보한 소현세자를 정적으로 취급하여 귀국 직후 독살해 버린다. 독살 이유는 "오랑캐와 너무 친한 죄"였다. 소현세자의 돌연한 죽음 덕분에 조선은 청나라의 부국강병책과 서구의 과학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상실했다.
소현세자 독살 후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가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효종)이다. 효종은 9년여 볼모 생활로 쌓였던 감정 덕분인지 노론의 우두머리 송시열과 손잡고 북벌론을 주창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다. 문제는 그의 파트너 송시열이 극단적인 소중화주의자, 쇄국 지상주의자였다는 점이다.
송시열은 "위기의 시대에 조선은 아름다운 문장을 지켜내기 위해 국경을 닫아야 한다"라고 외쳤다. 주변국이 해외와 교류 통상으로 국부를 창출할 때 조선은 시대착오적인 쇄국 위정척사의 길로 질주한 결과는 망국이었다.
펜앤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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