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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기자의 한 페이지] '옥수수 박사' 김순권…"한평생 '공생' 위한 삶 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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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옥수수 연구에 매진…최근 사료·바이오연료 활용 '하이브리드 옥수수' 개발

김순권 박사가 국제옥수수재단 시험포장 앞에서 옥수수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김순권 박사가 국제옥수수재단 시험포장 앞에서 옥수수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지난 5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국제옥수수재단 시험포장(試驗圃場). 등이 굽은 한 노인이 창이 있는 모자에 손수건을 뒤집어쓰고 뙤약볕 아래 한 길 넘게 자란 옥수수 줄기 사이를 헤집고 있다. 올해 여든 살. 한평생 옥수수 연구에 매달려온 '옥수수 박사' 김순권이다.

김순권 박사는 옥수수 한 알이 세계평화와 남북통일을 일굴 수 있다고 믿는 세계적인 육종학자다. 1970년대 후반 개발도상국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슈퍼 옥수수'를 개발해 한국과 동남아시아 등지에 퍼뜨렸다. 1979년부터는 17년간 나이지리아에 있는 UN 산하 국제열대농업연구소(IITA)에 근무하며 아프리카 기후에 맞는 슈퍼 옥수수를 탄생시켰다.

1998년부터는 북한을 59차례 드나들며 굶주린 주민을 먹여 살릴 옥수수 생산 증대에 힘썼다. 그 결과 지구촌 기아 해결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상 후보에 5회나 추천됐다.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한국을 빛낸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최근 그는 베트남, 캄보디아, 몽골 등에 맞는 종자 개발에 나서 속속 성과를 내고 있다. 얼마 전엔 16년의 연구 끝에 사료 효율성과 바이오에너지 생산성을 갖춘 하이브리드 옥수수를 개발해 화제를 모았다.

이날 만난 김 박사는 "식량 안보와 친환경 에너지 생산이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획기적 성과"라며 "앞으로도 계속 옥수수 밭에서 땀 흘려 일할 수 있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

김순권 박사가 국제옥수수재단 사무실에서 옥수수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도훈 기자
김순권 박사가 국제옥수수재단 사무실에서 옥수수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도훈 기자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농고를 졸업하고 경북대 농대를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농업 분야에 뜻이 있었나.

▶그건 아니다. 은행원을 최고의 직업이라고 여긴 아버지 영향으로 부산상고에 도전했지만, 입학시험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1년 동안 아버지 밑에서 농사를 배웠다. 돌이켜보면 일종의 선행학습이었다. 이듬해 울산농고에 들어갔는데 실습은 늘 일등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태풍이 고향 집을 덮쳤다. 아버지가 피해 복구 과정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병원비를 대려고 논을 팔았고 가세가 기울었다. 대학 진학은 무리였다. 아버지를 대신해 돈을 벌어야 했다. 농협 입사 시험을 쳤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인생의 두 번째 낙방이었다. 실의에 빠져 있는데, 경북대에 가면 장학금을 준다는 말을 듣게 됐다. 경북대 농대에 합격한 뒤로는 공부벌레처럼 살았다.

-옥수수와의 인연이 궁금하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처음엔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 박사처럼 육종학자가 되려고 했다. 어느 날 경제학과 교수님이 부르셨다. 경북대에도 농업경제학과가 생길 예정이니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해 농업경제학을 공부하고 오면 교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후자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대학원 시험을 준비했으나 낙방했다. 결국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청에 들어갔다. 다들 선호하던 벼를 연구하는 부서에 자리가 없어 옥수수 연구 부서에 들어간 게 출발이었다.

-하와이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농촌진흥청에 입사해 '제2의 우장춘'이 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배움의 허기는 가시지 않았다. 유학이 가고 싶었지만, 가난한 공무원에겐 자비 유학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노력 끝에 서울대 문턱보다 높다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WC)의 미국 유학 장학생 17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됐다. 1971년의 미국 유학은 본격적인 옥수수 육종학의 출발점이 됐다.

미국산 옥수수는 탐날 정도로 크고 질이 좋았다. 지속적인 품종 개량의 결과였다. 옥수수 연구가 한국보다 50년은 족히 앞서 있었다. 감탄과 한숨이 동시에 나왔다. 옥수수를 잘만 개량하면 수확량을 올려 우리나라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남들보다 더 공부했다. 결국 6년쯤 걸리는 석·박사 학위를 3년 3개월 만에 손에 쥐었다. 박사 과정 동안 20차례 옥수수를 재배하며 쓴 논문들이 세계농업학회지 등에 7차례 실렸다. 단숨에 세계 옥수수 학계의 스타가 됐다.

미국 최대 종자기업인 '파이오니아'란 회사에서는 농촌진흥청 월급의 20배였던 월 3천달러를 제의해 왔다. 하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내 손으로 만들어낸 옥수수를 우리 땅에 하루라도 빨리 심고 싶었다.

김순권 박사가 국제옥수수재단 시험포장에서 옥수수를 살펴보고 있다. 김도훈 기자
김순권 박사가 국제옥수수재단 시험포장에서 옥수수를 살펴보고 있다. 김도훈 기자

-그렇게 귀국해 개발한 종자가 '수원 19호' 등인가.

▶그렇다. 귀국한 뒤에도 하와이를 오가며 1977년 수원 19호를 개발했다. 강원 홍천·평창·영월의 시험 재배장에 종자가 뿌려졌고, 얼마 후 미국에서나 볼 수 있었던 씨알 굵은 옥수수가 주렁주렁 달렸다.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암초가 등장했다. "미국과 국제기구가 자네가 개발한 '수원' 시리즈는 한국 땅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네. 수고했지만 종자는 창고에 쌓아 두고 연구나 좀 더 해 보게." 농진청 선배의 말이었다. 옥수수 종자를 팔기 위한 미국의 로비가 뻔했다. 저는 "이 종자가 실패하면 10년 동안 감옥에 가 있겠다"는 말로 설득했다.

그해 강원도엔 바람이 심해 곳곳에서 흉작이 났는데 이게 좋은 기회가 됐다. 수원 19호는 전혀 넘어지지 않았고 전체 포기의 95%에 굵은 옥수수가 달렸다. 수원 품종을 심은 농민들은 수입이 전년보다 3배 이상 올랐다. "미국이 55년에 걸쳐 만든 옥수수 교잡종을 5년 만에 이뤄냈다"며 찬사가 이어졌다. 제 이름 앞에 '옥수수 박사'란 수식어가 붙은 것도 이때부터다.

-1979년부터 17년 동안 국제열대농업연구소에 근무했다.

▶한국형 교잡형 옥수수를 개발한 저에게 5억명 아프리카 인구의 식량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게 그들의 요청이었다. 2년 만에 옥수수 암이라고 부르는 위축 바이러스에 강한 신품종을 개발하자 나이지리아 정부가 후원자로 나섰다. 5년간 250만 달러를 연구비로 줄 테니 나이지리아에 맞는 옥수수를 개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결과 연간 100t의 옥수수를 생산했던 나이지리아는 제가 떠날 때 생산량이 700만t으로 늘며 자급을 이뤘다. 이 일로 큰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주는 명예추장에 두 번이나 추대됐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제가 육종한 '오바슈퍼 1호' 이삭을 50코보짜리 동전에 새겨 넣었다.

김순권 박사가 육종한
김순권 박사가 육종한 '오바슈퍼 1호' 이삭이 새겨진 50코보짜리 나이지리아 동전. 김도훈 기자

-북한을 지원한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나이지리아 근무 때인 1994년 북한에 엄청난 수해가 닥쳤다. 어릴 적 배고픔을 겪어봤기에 마음의 동요가 심했다. 북에 언니·오빠를 둔 아내는 더욱 가슴 아파했다. 1995년 귀국 후 경북대 교수로 재직하며 북한 식량 문제를 도울 방법을 고민했다. 경북대 농대 소유의 옥수수 농장에서 북한 토양에 적합한 슈퍼 옥수수 종자를 시험 재배하며 때를 기다렸다. 북한 당국은 공식 초청장을 5차례나 보내 나에게 방북을 요청했다. 우리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1998년 1월 방북 승인이 떨어졌다.

수많은 교배종을 만들어 북한 내 25개 연구농장에서 5년 동안 시험했다. 그 가운데 12종을 최종 선발해 협동농장에서 재배하도록 했다. 그 결과 평균 30% 이상 식량 증산이 이뤄졌다. 북한을 59차례 오가고 370일 동안 머물며 얻은 결실이었다.

-연구 활동 전반에 인류애가 깊이 녹아있는 것 같다.

▶제 삶의 철학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공생(共生)'으로 표현할 수 있다. 나이지리아에서의 일화다. '악마의 풀'이라고 불리는 '스트라이가(Striga)'라는 기생 잡초가 있는데 옥수수 밭을 폐허로 만들 만큼 위력이 강했다. 당시 선진국 학자들은 하나같이 100% 제거를 목표로 했던 반면, 저는 이 잡초에 강한 품종을 육종해 옥수수와 기생식물의 공생을 모색했다.

완전히 멸종시키려 하면 멸종 위기에 몰린 병원균이나 기생식물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더 강하게 공격해 오는 사례를 수없이 목격하고 깨우친 방법이었다. 그렇게 개발한 종자가 오바슈퍼다. 각기 다른 종자로 생산량 증대 등 목적에 부합하는 교잡종을 만드는 제 연구 활동도, 북한에 옥수수 연구성과를 전수하고 종자 개량 사업을 펼친 것도 모두 공생을 위한 것이다.

-여든이 된 지금까지도 연구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옥수수가 종자 1개가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저의 연구 활동이 세상을 조금은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특히 북한의 기아 해결과 남북 화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처음 옥수수 종자를 들고 북한을 방문했을 때 10년 내에 통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옥수수가 다시 남북 화해의 밑거름이 돼 남북통일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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