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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풍-서명수] 법관의 용기, 사법부 독립의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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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객원논설위원
서명수 객원논설위원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법부 독립은 '사법부 마음대로'가 아니라 사법부가 삼권분립 취지에 맞게 입법·행정부를 견제(牽制)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권력에 서열이 있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은 봉건왕조 시대에서나 통할 저급한 인식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혹여 중국과 북한식 독재체제처럼 이재명 정권이 중국공산당 같은 무소불위의 위상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정권 교체기에 대법원장이 중도 사퇴하거나 사퇴 압박을 받은 적은 있다. 그러나 정권 차원에서 대법원장 사퇴를 공개 요구한 적은 없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이른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사퇴 압박을 받았으나 임기를 마쳤다. 그 후 구속수사를 받았으나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사법 농단 수사는 무리수였음이 드러났다. '사법 농단' 프레임으로 사법부를 압박한 것 자체가 헌정사에 유례없는 정권 차원의 사법 농단이었다.

사법부 독립은 ▷법관 인사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헌법 제27조 ①항은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돼 있고 ④항에는 형사피고인은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推定)된다는 조항도 있다. 헌법 제103조에서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며 입법·행정부는 물론 정치 권력과 언론 등 외부의 압박에 구애되지 않고 양심에 따라 판결하라는 사법권 독립 원칙도 규정돼 있다.

'UN 사법부 독립 원칙'(UN Basic Principles on the Independence of the Judiciary, 1985) 역시 사법권 독립에 대한 국제협약이다. 굳이 남미 베네수엘라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내란전담특별재판부' 설치와 대법관 증원법안 발의 및 대통령실까지 가세한 조희대 대볍원장에 대한 여권의 공개 사퇴 요구는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문재인 정권의 사법 농단 프레임보다 더 '악랄하고 노골적인' 사법부 독립 파괴라는 국제적 비난을 각오해야 할 것 같다.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지난 5월 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를 '대선 개입'이라고 공격하면서 대법원장 사퇴 카드를 꺼낸 바 있었다.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이 기일대로 열렸다면 이 대통령의 대선 레이스는 멈출 수 있었다. 대법원 판결 이전 민주당이 절차상 이의를 제기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무죄를 확신한 민주당은 유죄 판결을 문제 삼았다. 그렇다면 징역 1년·집행유예 2년형의 1심 판결을 새로운 증거도 없이 무죄로 뒤집은 2심 재판부의 판결이 재판 농단이라고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서울고법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대선일(6월 3일) 직후인 18일을 첫 공판기일로 잡았으나 이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6월 9일, '추후지정'으로 변경하면서 재판을 중지했다. 재판부가 대선 후로 첫 기일을 지정한 것은 헌법 84조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대한 재판은 계속된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을 대놓고 파괴하는 권력에 대한 사법부의 대응 무기는 헌법에 보장된 법관의 양심과 용기다. 사법부 독립은 법관 스스로 지켜야 한다. 재판은 법관의 양심에 따라 언제든 재개할 수 있다. 사법부의 냉철한 분노만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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