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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풍-이용호] 집단적 망각(忘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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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호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용호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핵심 단어는 자유, 풍요(豊饒) 그리고 분열이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삶을 윤택하게 하는 물자도 넘쳐 난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자유를 군사독재 정권에 목숨 바쳐 쟁취한 덕분이었다. 배부르게 실컷 먹는다는 의미의 '흰쌀밥에 소고깃국'이라는 말도 '배고픈 시대'를 벗어난 1970년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의미를 잃었다.

이렇게 힘겹게 쟁취한 자유와 풍요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건강하게 유지·발전시켜야 할 자유의 가치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로 역주행하였고, '입법 독재'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전으로 갈 길을 잃고 있다. 풍요는 눈덩이처럼 커져 가는 국가채무, 그리고 안보와 경제의 동시적 위협 등으로 인해 불안정하다.

자유와 풍요가 익어 가는 와중에 분열이라는 복병도 만났다. 세대 간, 계층 간, 지역 간 간극(間隙)은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다. 분열이 극단화되면, 그 사회는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개연성이 커진다. 안보에 구멍이 뚫릴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북한은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80주년 열병식에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20형'을 공개하였다. 이것은 북한 핵무기의 고도화 징표이며, 북·중·러 전체주의 국가의 연대 강화 및 러시아 파병의 파생물인 북한군의 실전 경험 등과 함께 한반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갈 수도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특히 신고립주의를 기조로 하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식 대외 정책과 맞물리면서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치는 조짐이다. 대한민국의 안위에 큰 변동성이 다가오는 듯하다.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강력한 자주국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자주국방은 말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군사비가 세계 전체 군사비 대비 2%(2023년 기준) 수준인 데 비해, 미국은 37%에 이른다. 결국 글로벌 시대에 있어서 미국 등과의 동맹관계를 배제한 안전보장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아가 병력 자원의 감축, 각종 군 훈련의 연기·축소, 군의 사기와 명예의 추락 등도 대한민국의 안보 환경에 부정적 요인이다. 과연 누가 우리의 젊은이를 전쟁이라는 죽음의 땅으로 내몰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은 최단기간 내에 자유와 풍요를 한꺼번에 이루어 왔고, 지난 계엄 사태에서도 국민의 이름으로 그 사태를 제자리로 되돌리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대한민국, 그 국민, 참! 위대하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함을 과신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자유는 침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떠한 경우에도 독재는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라고,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집단적 망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국민이 안이하고 무관심하게 유리한 것만 선택적으로 기억하면서, 자유와 전쟁의 참의미를 내팽개친다면, '끓는 물 속의 개구리' 이야기처럼, 대한민국의 자유와 안보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선배 세대가 해 왔던 것처럼, 독재든 '위장된 독재'든 그에 맞서서 자유를 쟁취해야 하고, 전쟁에는 불굴의 의지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공원'에 "Freedom is Not Free"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자유(평화)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용호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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