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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어렵고 샘나거나, 유익하고 신기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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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법과 양심/사회적 원자/공부도 인생도 국어에 답 있다/할리우드 영화사

영화평론가 백정우

왕가위 감독의 영화 <일대종사>의 오프닝 자막. "실력은 둘 중 하나다. 수평과 수직. 지는 자는 수평으로 쓰러지고, 서 있는 자만이 말할 자격이 있다." 책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이 자막을 정반대로 빗대곤 한다. 그러니까 서가에 꽂힌 채로 언제 손댈지 모르는 책과 책상에 수평으로 놓여 곧 나와 만날 책. 오늘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수직 상태였던 녀석들, 오랜 숙제를 끝낸 기분으로 설날 연휴에 읽은 책을 소개한다.

『법과 양심』 김우창(에피파니)

김우창 저작의 궁극적 지향은 '어떻게 인간이 윤리적 결단을 통해 품위 있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가'에 있는 듯하다. 그는 세상 전체에 공감하면서도 이 현실을 비판하고, 이런 비판 가운데서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얻는 기쁨을 제시한다. 최장집은 '세계 최고 수준의 철학적 인간학'이라 헌사했고,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원'이라고 도정일 선생이 명명한 김우창의 저작은 심미적 인문주의의 정수다. 솔직히 말해, 즐겁게 잘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읽으면 알게 된다. 왜 김우창인지, 이런 유의 책도 읽어야 하는지를.

『사회적 원자』 마크 뷰캐넌(사이언스북스)

경제학자가 쓴 수학 이야기처럼 보이고 수학자가 쓴 경제학 참고서로도 보이는 이 책은 물리학자가 쓴 물리학 서적이다(리처드 도킨스의 명저 『이기적 유전자』와 혼동하지 마시길). 마크 뷰캐넌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패턴.' 즉 사람이 아닌 패턴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계량 재정 금융학과장에 경제학자가 아닌 닐 존슨이라는 물리학자를 선임한 사실을 들어, 금융시장 예측에 경제학만큼이나 물리학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추동하는 거대한 힘에 관해 통계학에서 양자역학까지 두루 망라하면서도 쉽게 기술한 저자의 지적 사유에 질투를 느끼게 되었다.

『공부도 인생도 국어에 답 있다』 허철구(알투스)

1988년에 표준어 규정이 생기고 1999년에 표준국어대사전이 나왔지만, 표준어를 공식적으로 수정 보완한 것은 2011년이다. 당시 '짜장면'을 비롯한 39개 항목이 추가되었다. 저자는 '짜장면'을 표준어로 받아들인 예를 들면서 '세다, 작다' 등도 '쎄다', '짝다'로 적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소리가 변했다고 표기까지 바꾸는 일이 간단치 않다는 것. 나는 짜장면을 표준어로 올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걸 긍정적으로 본다. 무엇보다도 규범이 자주 바뀌면 제 기능을 하기 어렵고, 금방금방 바뀔 규정이라면 애써 배울 필요가 없기 때문. 훗날 어떤 식으로 변할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표준어로 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게 이치에 맞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할리우드 영화사』 데이비드 톰슨(까치)

2004년 초판본이 나온 명저이다. 할리우드 영화사와 영화산업의 모든 것. 영화평론가이면서 영화학자인 저자는 할리우드를 둘러싼 흥미진진한 뒷얘기와 영광의 시대를 풍미한 감독들의 사적 에피소드까지 망라하면서도, 냉정하고 객관적 시선을 놓는 법이 없다. 시대를 초월해 다양한 읽을거리와 생생한 현장감을 주는 놀라운 저작. 모름지기 영화평론가란 개별 영화에 대한 비평을 넘어 영화사적 연구와 광대무변의 문화·예술적 통찰까지 소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영화애호가라면 영화 리뷰 쓰기에 대한 새로운 해법과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절판된 책이니 중고서점이나 도서관을 이용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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