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했을까?
우리는 흔히 고당 전쟁을 '안시성 전투'로 기억한다. 당 태종이 침략했고, 양만춘이 이를 막아냈으며, 결국 당나라가 패배했다는 이야기이다. 왜 당나라는 막대한 국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을까? 왜 안시성에서 대패한 뒤에도 수년 동안 전쟁을 계속했을까?
고당 전쟁은 유라시아 동부의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신흥 패권국과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동방의 강국이 충돌한 국제대전이었다. 전쟁의 무대 역시 요동만이 아니라 동아지중해와 황해, 압록강 하구와 한반도까지 이어졌고, 간접적으로는 몽골 초원과 실크로드, 티베트 고원까지 하나의 전략 공간으로 연결되었다.
당나라는 4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국제질서 아래 편입시키려는 거대한 국가전략을 추진하였다. 당태종의 목표는 영토 확장을 넘어 범동아시아 패권 질서의 구축이었고, 그 과정에서 동방세력의 핵심국가인 고구려는 반드시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이었다.
전쟁 직전인 644년 당 태종이 내린 조서에는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이다(遼東故中國地)"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군사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흥미롭게도 이 논리는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내세우는 역사인식과도 일정한 공통점을 가진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국가가 패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역사 논리는 놀랄 만큼 유사하다.
◆당나라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과 고구려의 대응
당태종은 수나라의 패인을 알았으므로 먼저 국제환경부터 바꾸었다. 패권국은 주변 강국을 그대로 둔 채 중심국가가 될 수 없다. 먼저 북방에서는 630년에 동돌궐을 격파하고, 단계적으로 철륵의 설연타부(薛延陀部)를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몽골 고원의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 북방의 위협을 크게 줄였다. 이어 서쪽에서는 고창국(현재 투르판)을 정복하여 실크로드의 핵심 구간을 장악하였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국제 교역망을 확보하는 전략이었다.
남서쪽에서는 송첸감포가 통일한 토번과 대립하였다. 강력해진 토번은 토욕혼을 공격했고, 20만의 대군으로 당나라를 공격했다. 당 태종은 결국 641년에 문성공주를 토번에 시집보내는 혼인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는 고구려 원정을 앞두고 서남 방면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남쪽에서는 북베트남 지역인 임읍(참파)을 수나라에 이어 다시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면서 강남 경제권과 해상교역을 적극 육성하여 동남아시아와 연결되는 해양 무역망을 확대하였다. 이렇게 해서 당나라는 자국을 중심으로 북방 초원, 서역, 티베트, 남중국과 해상 무역권을 차례로 정비하였다. 이제 남은 마지막 전략 공간은 고구려의 영토인 요동과 동아지중해였다.
한편 고구려 또한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수나라의 수군 공격을 격퇴시킨 경험이 있는 영류왕은 즉위한 후에 외교를 통해 시간을 벌려 했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전쟁을 피하려 하였다. 비효율적인 천리장성을 축조한 것도 단순한 방어시설의 증축이 아니라 요하 회랑을 중심으로 한 전략 공간을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당나라가 구축하는 신국제질서 속에서 독자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는 상황이었다. 결국 고구려 내부에서도 외교와 항전을 둘러싼 치열한 노선 갈등을 낳았고, 결국은 연개소문의 정변과 집권으로 이어졌다.
◆고당 전쟁은 왜 국제대전이 됐는가?
당태종은 국제질서를 정비한 뒤, 마침내 고구려를 향해 움직였다. 644년 이세적(李世勣)에게 육군을 맡기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직접 요동으로 향했다. 동시에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도총관으로 삼아 4만여 명의 수군과 500척의 전선을 산둥반도에서 출항시켰다. 이 순간부터 고당전쟁은 단순한 국경전쟁이 아니라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움직이는 해륙양면전으로 전개되었다.
당나라의 전략은 분명했다. 육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의 성곽 방어선을 차례로 돌파하면서 고구려의 주력군을 묶어 두고, 수군은 요동해안을 장악한 후에 황해를 건너 압록강 하구와 대동강 방면으로 진출하여 평양성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두 전선이 연결되면 수도 평양은 전략적으로 고립되고, 고구려는 전쟁 수행 능력을 잃게 된다. 이는 오늘날 말하는 협공작전이자 입체적 전략이었다. 과거 수나라는 113만여 명의 수륙군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켰다가 장거리 보급과 고구려의 기동전에 휘말려 무너졌다. 반면 당나라는 소규모의 정예병으로 해륙양면전으로 고구려의 전략적 종심을 분산시키려 하였다. 전쟁 방식 자체가 한 단계 진화한 것이다.
◆ 군사전략의 '축(povot)'인 요동 회랑 공방전
고구려 역시 이러한 전략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연개소문 정권은 성곽 하나를 지키는 데 전력을 집중하지 않았다. 요동의 여러 성을 방어 거점으로 연결하고, 적을 지연시키면서 병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실제로 요동의 성들은 각각 독립된 요새가 아니라 하나의 방어망을 이루고 있었으며, 어느 한 곳이 함락되더라도 전체 전선이 곧바로 붕괴되지 않는 시스템으로 구축됐다. 특히 요동 지역은 북방유목세력의 남진 종점이었고, 중원 세력들이 만주와 한반도로 진출하는 회랑이자 동아지중해와 연결되는 전략 공간이었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이래 안정적으로 지정학적인 요동 회랑을 장악하며 중국 왕조와 북방 세력의 진출을 견제하였다. 반대로 당나라가 이 회랑을 확보한다면, 고구려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의 국제질서를 주도할 수 있었다. 양국 모두 요동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전쟁은 예상대로 치열하였다. 당군은 개모성에 이어 난공불락의 요동성마저 함락시키며 서쪽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당나라의 공성기술과 병력은 강력했으므로 고구려군은 성 하나의 사수보다는 시간을 벌면서 주력을 보존하는 전략을 유지하였다. 당군은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는 처음 계획보다 훨씬 늦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은 전쟁의 승패가 성 몇 개의 점령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병력의 보존, 보급선의 유지, 전선의 지속성이 훨씬 중요하다. 고구려는 독특한 방어시스템과 공간을 활용하여 시간을 벌었고, 그 시간은 결국 당나라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전쟁은 단기 결전에서 장기 소모전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태종은 요동 방어선의 마지막 관문 가운데 하나였던 안시성 앞에 도착한다.
◆안시성 공방전과 당나라의 대패배
안시성은 당나라가 이미 개모성과 요동성, 백암성마져 함락시키고, 주필산 전투에서 대승한 당군은 자신감을 갖고 도착했다. 당태종은 안시성을 함락하면 곧 바로 압록강 방어선까지 진격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안시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성주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군이 치밀한 방어와 강한 항전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당군은 흙산을 50만 명의 병사가 60일 동안 쌓아가며 대규모 공성전을 반복했지만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전투 그 자체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데 있었다.
본국에서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 싸우는 당나라군에게 병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급이었다. 식량과 무기, 말 사료는 모두 장거리 수송에 의존했고, 전선이 길어질수록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반면 고구려는 자국 영토 안에서 싸우며 시간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성의 공방전이 지연될수록 당나라 전략은 붕괴되고 있었다. 계절도 당나라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음력 9월이 된 요동의 겨울은 중원과 전혀 달랐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강풍과 적설은 병사와 말의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황은 고구려에게 유리해졌다.
◆국제환경의 변화와 당나라의 철수
더 큰 문제는 내부이 정치적인 혼란과 국제정세였다. 특히 북방에서는 설연타가 움직일 가능성이 있었고, 서남에서는 토번이 강력한 세력으로 위협을 가하는 중이었다. 국제질서는 완전히 안정된 체제가 아니었으므로 황제가 오랫동안 원정지에 머무를수록 국가적인 이기가 커졌다. 바다 또한 변수였다. 당나라는 수군을 동원했지만 육군과 수군의 협공은 원활하지 못했다. 안시성 공방전이 한창일 때 요동반도 남쪽의 비사성을 점령한 장량의 수군은 먼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고구려는 요동반도 남단의 장산군도에 설치한 섬방어체제들이 역할을 담당했고, 필시 압록강 하구와 대동강 수계를 활용하여 수도권을 방어하여, 육지와 해양을 유기적인 전쟁 공간으로 운영하였을 것이다.
결국 당나라의 협공 전략은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당태종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흔히 안시성의 저항때문에 철수했다고 설명하지만, 실제 상황은 훨씬 복합적이었다. 안시성의 완강한 저항 외에 장거리 보급의 한계, 혹독한 계절, 예상보다 길어진 전쟁, 북방과 서남의 국제정세, 그리고 해륙 협공의 실패가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당태종은 후퇴하는 도중에 한겨울로 접어든 음력 10월의 요택지대에 빠져 처절하게 고통을 받은 사실들이 삼국사기와 자치통감 등에 기록되어있다. 그는 태자인 당고종이 보낸 결사대에 의해 구원받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돌아왔다. 이때 말은 10의 8, 9가 얼어죽었다. 반면에 고구려는 국가 시스템, 기술력, 무엇보다도 양만춘이라는 인물의 탁월한 지도력과 고구려인들이 지닌 자유의지가 기적같은 승리를 획득한 것이다. 안시성 전투는 당나라를 무너뜨린 결정적 승부라기보다, 당나라가 추진하던 동아시아 패권전략에 처음으로 제동을 건 사건이었다.
◆당태종의 재공격과 해군력 강화
당태종은 패권전략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철군 직후에도 요동 방면의 군사력을 계속 유지하였고, 수군을 증강하면서 고구려 공격을 위한 새로운 준비를 시작하였다. 645년의 실패를 통해 육군만으로는 승리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해군력을 대폭 증강하면서 평양을 직접 압박하는 해양전략을 강화하였다. 644년 7월에 홍주 등 강서성 일대 등에서 전선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운반했다. 큰 전선들은 800명의 병사를 수용했고, 일반 누선(樓船)도 200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 또 648년 7월에도 양쯔강 상류(쓰촨)에서 전선들을 건조하고, 8월에는 홍주 등에서 1100척을 건조하게 했다. 실제로 647년 5월, 7월에는 당나라 수군이 요동반도와 압록강 하구사이의 해안지방에 상륙하여 백 여 차례나 전투를 벌였다. 또 648년에도 수군이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단동시)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황해를 건너 평양성을 목표로 직공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국경과 해양에서 모든 공격들을 격퇘했다. 이는 고당전쟁이 처음부터 해륙양면전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당태종의 공격들은 전략적으로는 요동회랑의 확보전이었지만, 장기 국제대전의 한 국면이었다. 당나라는 전략을 수정하며 다시 기회를 노렸고, 고구려는 계속되는 소모전을 감당해야 했다. 양국 모두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태종이 재 원정을 준비하다 649년에 죽으면서 전쟁은 일시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하지만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싼 국제대전은 660년 여름, 더 복잡한 양상으로 재개됐다. 우리민족의 운명과 연동된 소위 '삼국통일전쟁'이다.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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