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이번 전시에 출품한다고 보내준 알록달록한 그림이 있었는데, 작업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대자 바로 앞에 놓여있던 시커먼 그림을 가리키며 작가가 말한다. "이게 그 그림이예요. 나답지 않게 너무 예뻐서 다 덮어버렸어요."
전시 앞두고 메인 작품 사진을 출력까지 해놓고 덮어버리는 작가라니. 그는 "작가란 세상에 자신의 그림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의 치열한 사투 끝에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기자, 동요 가수로 활동하다 화가로 전향한 이문(이춘호) 작가의 얘기다. 벌써 4번째 선보이는 전시인데, 이번 전시부터 활동명을 '이문'으로 바꿨다. 그는 "아호가 변방 새(塞)에 달 월(月) 자를 써서 '새월'이다. 그래서 달을 뜻하는 문(moon)을 이름에 넣었다"고 말했다.
그의 첫 그림은 붓글씨였다. 재야 서예가였던 아버지의 피를 받아 평소 붓글씨 쓰는 것을 좋아했다. 흑과 백만 존재하던 작품 위에 실수로 아크릴 물감이 쏟아진 어느 날 그의 눈이 번쩍 뜨였고, 그때부터 그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현대서예에서 현대미술로 건너오게 됐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마치 갈라진 틈으로 용암이 분출하듯 내면에서 주체할 수 없을만큼의 열정이 흘러나왔다. 그간 틈틈이 공부해온 미술사적 지식과 수없이 눈여겨본 작품들도 감각적인 표현의 바탕이 됐다.
또한 일사 석용진과 율산 리홍재, 천수 노상동, 김호득, 권기철, 길후 등의 작품이 큰 기운을 줬고, 사이 톰블리와 윌렘 드 쿠닝, 안젤름 키퍼 등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렇게 그려낸 그림들로 2022년 첫 개인전 '얼굴의 연대기(Facetory)'를 열었다. 한껏 찌그러진 괴상한 얼굴 그림. 그는 "미술의 출발은 얼굴이고, 추상화 등으로 나아갔다가 결국엔 다시 자신만의 인물화로 돌아온다고 본다"며 "코로나 팬데믹으로 힘든 청년 백수들과 혼자 절망의 시간을 견디는 실버 외톨이들 등 외로운 이들의 암울한 마음에 내 그림을 헌정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후 2024년 최복호 패션디자이너, 윤성도 전 계명대 동산병원장 등 이른바 비전공 화가들과 함께 대덕문화전당에서 '삼놈전'을, 지난해 경주 라한호텔 오션갤러리에서 '페이스라인파라다이스' 개인전을 열었다. 면에서 벗어나 이리저리 엉켜진 선이 두드러지는 그림들을 내걸었다. "이전의 현란한 컬러와 형세를 정제하고 싶었다. 수직으로 분출하는 창작욕을 수평화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1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전시의 주제는 '야성(野性)'. 3년 간 1천여 개의 그림을 그릴 정도로 창작욕이 넘치는 그가 얘기하는 '에너지의 원천'을 엿볼 수 있다. 이전 작품의 선적인 요소는 거의 사라진 모습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골판지에 그렸다. 구하기 쉽고 작업하기에 편한 소재여서다. 골판지 위에 뭔가를 붙이고, 칼로 긋고, 찢고, 덧칠하고, 심지어 실로 찢어진 부분을 꿰매는 그의 작업은 마치 상처를 입고 다시 회복하며 단단해지는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것 같기도 하다.
"의도를 갖고 그리기보다, 그림이 날 물감처럼 갖고 놀게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 마그마가 왜 이렇게 끓어넘치는지는 분석 불가입니다. 내 팔자이자,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빨리 작품이 변한다는 이들도 있지만 그만큼 표현하고 싶은 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음 전시 때는 인물 형상에서 90% 이상 벗어나, 형이 거의 사라진 절대추상으로 건너가고 싶다고 말했다. 벌써 조각, 도자 작업도 시작했다. 그의 예술 세계가 얼마만큼 확장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문 작가의 개인전 '야성으로부터'는 오는 9일부터 15일까지 중구 방천시장 인근 보나갤러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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