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악 씨는 속상하다. 평생 법을 수호하고 살아온 인생이다. 사회 정의 실현과 국민의 기본권 보장 의지는 남산 위의 소나무 같았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배려에 대한 인식은 견주어 다툴 사람이 없었다. 도덕성은 태악 씨 앞에서 그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누군가 대한민국에 정의가 어디 있느냐 물으면 그가 있는 곳을 가리키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공짜나 밝히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국고나 갉아먹는 파렴치한 세금 도둑이 되어 있었다. 존경의 인사 대신 손가락질을, 심지어 이름을 가지고 오래되고 거대한 악이라는 뜻의 老泰惡이라 바꿔 부르며 조롱했다.
세상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 타고난 머리를 애국적 소명으로 승화시킨 나에게 이토록 무례하면 안 된다.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질타를 들으며 태악 씨, 아마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서 몸속에서 암세포가 마구마구 자라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동방예의지국에서 대접을 말로만 해서야
사람들은 말한다. 투표용지가 부족한 게 말이 되느냐고. 선관위원장이면 최소한 선거는 제대로 관리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만 맞는 말이다. 자기는 비상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민들은 너무 모른다. 고위공직자 사회라는 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한민국은 위원회 공화국이다.
심사위원회, 자문위원회, 평가위원회 등 이름도 그럴 듯한 위원회가 수두룩하고 이들은 고위공직자 혹은 바로 직전 퇴직자를 위원장으로 위촉한다. 게다가 태악 씨가 맡았던 선거관리위원회는 그런 시시한 레벨이 아니다. 무려 헌법 기관이다. 그래서 자기 같은 대법관이 위원장으로 가는 것이다.
실무 당연히 안 한다. 이름만 걸어 놓고 명예만 챙긴다. 예우를 말로만 하는 건 실례다. 예우를 현실화해야 하고 그게 보통은 해외 출장이다. 명목? 아무리 후진 나라라도 배울 게 하나는 있다. 급수에 맞는 해당 국가 담당자가 만나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행히 6.25 전쟁 때 수많은 나라들이 참가했고 그 나라 한국전쟁 참전비에 가서 헌화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렇게 독일과 에스토니아를, 호주와 뉴질랜드를 다녀왔다. 북유럽은 특히 우리가 배울 곳이 많은 지역이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기관이 한번쯤은 북유럽을 연구했고 그래서 태악 씨도 덴마크와 스웨덴을 다녀왔다. 그냥 그게 다다. 대접해 주기에 받았고 관행이었기에 당당했다. 그런데 대체 왜! 왜! 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태악 씨, 마치 암세포가 사방으로 전이되는 기분이다.
◇잘 안 보이는, 그러나 나라 곳곳의 숨은 기생충들
태악 씨의 속을 끓이는 게 또 있다. 출장 때마다 수행한 선관위 직원들이다. 국가 위상도 있고 최소한의 의전도 필요하다. 해서 바쁜 일정 쪼개서 따라 나간다. 그러나 이건 그냥 밖으로 보이는 얘기고 이 역시 모르는 사람은 평생 모르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각종 위원회의 숨은 복지다. 직책별로, 연차별로 순번 정해놓고 위원장의 출장 보좌를 빙자해 사심 해외여행을 즐긴다.
그러니까 태악 씨는 병풍이고 실속은 그들이 챙기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런 식 나랏돈 해외 출장이 해마다 수십 건은 될 것이다. 이런 말 너무 하고 싶다. 그런데 체면이 발목을 잡는다. 그게 속상하다. 자기만 타깃이 되어 화살을 맞고 있으니 갑자기 전이가 빨라져 말기 암이 된 느낌이다.
◇떳떳하십니까, 태악 씨
거푸 말하지만 자기만 그런 거 아니다. 관행이었을 뿐이다. 다만 자신이 유난히 불운했을 따름이다. 하필 자기 임기 때 투표용지가 부족했고 무능한 놈들이 그걸 제대로 대처 못했고 그러다 보니 조직을 사방에서 파헤치는 바람에 해외출장까지 문제가 된 거다. 해외출장에서 사진만 안 찍었어도, 사진에 배우자만 안 나왔어도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투표용지부족만 아니었어도, 이런 식으로 각종 하필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리를 문다.
억울하고 속상한 거 다 알겠다. 그런데 다 떠나서 태악 씨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와인 잔을 앞에 둔 사진 속 태악 씨는 참 호탕한 얼굴이다. 아마 배우자에게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 남편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미안하지만 그건 태악 씨의 자랑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태악 씨가 살면서 자신의 배우자에게 보여준 가장 부끄러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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