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중인 1592년에 의성 김시 집안에서 자녀의 옷깃에 넣어 보존한 족보 {의성 김시 화여세계}가 학계에 보고돼 관심을 끌고 있다. 올해로 4백2년째인 이족보는 안동권시 성화보, 문화류시 족보보다는 늦으나 현존하는 의성김시 병신보(1656년)보다 64년 빠른 것이다. 경북대 김시황교수에 따르면 이 족보는학봉 김성일 친조카로 임란때 안동수성장을 지냈던 김용이 만들었다. 안동에살던 김용의 아내는 난이 터지자 여섯 아들을 데리고 청송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전에 다섯살바기 막내아들 시과의 옷깃안에 창호지에 세필로 쓴 족보를꿰매어주었다. 집안의 내력을 제대로 모르는 어린 막내에게 만약의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한 것이다.그런데 김용의 식솔은 피난도중 왜군을 만나 시과를 잃어버렸고, 시과는 문경에 사는 김해김씨 양아들로 입적됐다. 난리중에 옷에 불이 붙어 족보는 절반이상 타버렸다. 시과가 55세 되던 1642년 당시에 저명한 고승이자 그의 수양삼촌인 혜징법사는 입양된 시과의 집안 위치, 재산관계를 확고히 한 {수양질시과별급문권서}를 남겼다.
1777년 권씨란 사람은 혜징이 남긴 문건과 반쯤 불타버린 족보가 귀중한 자료라고 문헌에 적었고, 1805년 김순천(시과 8대손) 생존시 이우량이란 사람이또다시 고첩과 문서들의 중요성을 재발견하여 의성김씨 문중에 보내는 편지를 썼고 순천은 문중회의에서 자손임을 확인받았다. 순천은 이에 그치지 않고문서를 문경현의 {관제}, 경상감영의 {영제}, 례조 {춘조상}에까지 단계를거치며 최종 확인받았다.
불탄 족보를 {의성김시 화여세계}로 명명하고 배접한 이는 문경의 엄현감으로 가로 39cm, 세로 15cm 14첩으로 배접하고 딱딱한 겉장을 붙였다. 이로써농사를 짓던 김시과는 사족의 위치를 찾게 되었으며, 현재 이 고첩은 시과의12대손인 원노씨(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가 소장하고 있다.선비들이 뒷일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준비했고, 합리적으로 진실되게 일을 처리한 실례를 보여준다는 김시황교수는 대만 족보학회 발표에 이어 국내학계에도 보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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