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생활-미 구제품서 첨단 스포츠웨어로

해방 반세기에 돌아보는 우리의 의생활 변천사는 그야말로 {격변} 그 자체이다.고유의 한복이 드센 양풍에 밀려나가고, {서양귀신들의 얄렛은 옷}이 단50년만에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옷은 시대의 거울}이라했듯 빛바랜 사진첩속 추억으로 남아있는 그 시절 그 옷들엔 격동기 삶의 흔적이 올올이 배어있다.

해방무렵. 대부분 직접 길쌈을 매 옷을 짓던 그 시절엔 옷이 일종의 호사품이었다. 내남없이 꾀죄죄한 차림이었으며 아이들 옷은 어른들의 헤진 옷을 잘라 만들거나 {우라까이}(안팎을 뒤집어)해서 입혔고, 맏이 옷은 누덕누덕 기워가며 막내까지 물려졌다.

남자들은 무명에 검정물감이나 쑥물을 들여 양복을 지어입기도 했다. 다래(목화)를 굴뚝안에 매달아 연기로 물들이던 그런 시절이었다.45년 당시 우리나라의 20-50세 여성중 약 1%만이 양장을 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일부 신여성이나 유학생들을 제외하고는 한복이 주류를 이루었다.해방직후 중국서 귀국한 김옥순씨(66)는 [중국서 입던 {다이또(타이트)} 스카트에 블라우스, 구두를 신고나가면 {땐사(댄서)}라 했고 지지미 한복을 입고나가면 기생이라는둥 애매한 소리도 많이 들었다]며 옛날을 회상했다.그러나 해방이후 미군진주와 잇단 해외동포들의 귀국, 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은 우리네 의생활에 급격한 변화를 몰고왔다. 미국의 구제품옷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난생처음 양복착용이라는 새 경험을 갖게했으며, 미군에서 흘러나온 사지와 낙하산천, 담요등이 옷감으로 인기를 끌었다. 할리우드영화 {애수}의 비비안 리가 입었던 트렌치코트나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 패션이유행하기도했다. 당시 패션의 리더들은 {양공주}들. 맘보바지에 하이힐,블라우스를 배꼽쯤에서 잘끈 묶은 대담한 차림들이었다.

{-양복바지라기보다는 아랫내의를 입었다는 말이 알맞을듯-, 영양부족증의거위나 황새가 엉덩이를 흔들고 걸어가는-} 등의 신문기사들이 이를 꼬집기도 했다.

{마카오신사}라는 유행어도 있듯 한량들은 료마이(더블재킷)에 나카오리(중절모), 마늘코 구두로 거드름을 피웠으며 여자들은 겨울엔 경도(경도)빌로드에 양단저고리, 또는 뉴똥한복, 여름엔 모시 치마저고리에 하이힐이면 최고의 멋쟁이였다.

6.25이후 몇년간은 한복저고리에 몸뻬,한복치마에 스웨터나 블라우스를 받쳐입거나 구두속에 버선을 신는 등 한.양복 혼용현상이 지속되기도 했다.53년엔 일본산 나일론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당대를 풍미한 소설 {자유부인}에 대학교수 월급이 3만원인데 비해 나일론한복 한벌값이 1만5천원으로묘사될만큼 고가품이었지만 나일론을 입지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여겨질 정도였다.

60년대초에는 5.16혁명세대에 의한 신생활재건운동에 따라 노타이셔츠, 재건복 등 검소한 복장이 장려됐다. 월남파병과 함께 60년대중반엔 소위 {월남치마}가 전국을 휩쓸었으며,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해 미니선풍을 일으켰다.

살금살금 올라가던 치마가 나중엔 아슬아슬할정도로 짧아져 곳곳에서 무릎위30cm여부를 재는 광경이 펼쳐졌다. 70년대중반까지는 미디, 맥시, 핫팬츠,판탈롱, 청바지 등이 유행했다.

70년대부터는 기성복시대가 열렸으며, 80년대에는 여성들의 사회진출, 레저생활의 확산 등으로 스포츠웨어 등 캐주얼스타일의 대중화가 두드러졌다.90년대 이후로는 신세대들이 패션을 이끌고 있다는 디자이너 최복호씨는 [제멋대로 입은듯한 차림, 과감한 자기표현 등 개성과 파격성, 자유로움이 특성]이라고 말했다.

밤새 호롱불아래 옷 짓던 어머니의 모습과 집집마다 또드락 또드락 음악처럼들리던 다듬이소리, 명절 새옷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들, 옷자락 꼭꼭여며입던 옛여인들... 50년전과는 상전벽해(상전벽해)로 달라진 요즘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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