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3년6개월동안 일본군과 1백80여회의 교전기록을 가진 경북지방 의병의 4대격전지가운데 한곳으로 알려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눈.이곳에는 입암서원이 자리해 예로부터 선비의 기개가 골골이 배어있는 충절의 고장이다.그러나 입암리는 이고장 주민들에게 한말의 병사에 길이 남을 산남의진의의병항쟁 격전지로 더욱 잘 알려져있다.
산남의진은 영천출신 정환직 정용기부자가 1천여병의 의병을 이끌고 1906년 3월 영천에서 기병, 3년여간 경북일원에서 항일유격전을 편 의병부대다.때는 국운이 바람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던 한말인 1907년 10월 9일.이날 저녁 입암리에는 정용기의병대장 휘하의 산남의진 의병 1백여명이 청송방면에서 들어와 주둔해 있던 일본군 수비대와 첫전투가 벌어져 밤을 새우는 교전이 전개됐다.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될 정도로 격렬한 전투는 결국 무기의 열세와 수적으로 중과부적인 의병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산남의진은 이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최영각 좌영장권규섭등이 전사하는등 1백여명가운데 대부분의 군사를 잃어 치명적 타격을입었다.
그러나 입암리전투는 의병들로 하여금 본격적인 대일항쟁을 시작하는 의병전투사의 분기점이 됐다.
이때부터 산남의진은 정순기등 남은 부장들이 군사를 수습, 정용기대장의아버지이자 60고령의 늙은 선비 정환직을 2대 대장으로 추대하고 부대진영을새로 갖췄다.
정환직대장이 이끄는 산남의진의 대일항쟁은 경북동해안과 북부지역을 오르내리며 곳곳에서 일본군을 쳐부수는 대승을 거둔다.
당시 전투기록에 따르면 산남의진은 1907년 10월28일 청하공격 분파소 적1명 사살, 10월29일 흥해공격 적3명사살, 11월3일 신영공격 사택 불태우고 무기4백여점 압수, 11월4일 의흥공격 무기 1백50여점 압수, 11월6일 흥해공격적2명사살등 잇따라 대전과를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동대산 전투를치르고 난 1907년12월11일 겨울을 나기위해 영덕군병곡면 각리에 머물던 정환직대장은 일본군에 체포된다.
흥해출신 최세윤을 3대대장으로 맞아 부대를 소수인원으로 분산 유격전 체제로 바꾼 의진은 영덕 울진 청송 영해등지서 끈질긴 항전을 벌였다.그후 남동대산으로 본거지를 옮긴 부대는 각지대로 분산돼 일본군의 눈을피해가며 팔공산 주왕산 비학산등에서 본격적으로 활발한 유격전을 벌이도록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우수한 신식무기를 당하지 못한 산남의진은 수많은 희생을 내게되고 겨울철로 접어들면서 최세윤대장마저 체포되자 입암리에서 첫전투의 기치를 올린 항일의병 유격전의 대단원은 3년여만에 안타깝게도 막을내리게 된다. 〈포항.김상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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