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해외기획취재 시리즈-미국이민

미국에 우리 민족이 얼마나 있었길래 그같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놀랍게도 그 숫자는 많이 잡아야 8천여명이다. 이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어른인 것도 아니었다. 그 속에는 어린아이들도 포함돼 있었던것이다.이 숫자는 광복되던 1945년까지도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 미국정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40년 현재 미국 거주 우리 민족은 8천5백15명에 그치고 있다. 지금 미국 교포 숫자가 2백만명에 가깝네 하는 것은 1965년에 미국 이민법이 바뀐 이후 일일 뿐이다.

40여년을 지내면서도 왜 인구가 늘지 못했을까? 그 얘기는 앞으로 점차 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초기 이민들의 절망과 고난에 직결된 것이었음만 환기해 두자.

미국내 우리 민족의 숫자 계산은 간단하다. 이민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노동이민이었다. 그 숫자가 어른남자 6천48명, 어른여자 6백37명, 미성년 남녀5백41명 등 7천2백26명이다. 그 다음 많은 숫자는 먼저 미국에 가 있던 노동이민 총각들에게 시집가느라 이민간 처녀들로, 1천66명이다. 이들도 사실은동류라고 볼 때, 전체 노동이민은 8천2백94명이 되는 셈이다.나머지는 미국에 유학해 정착한 이들이다. 1918년까지 총 유학생은 6백20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중 이민한 사람은 5백여명으로 보면 될 듯도 하다.

그렇다면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은 모두 9천여명이 된다. 그러나 그 중 9백83명은 1910년 이전에 한국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래서 남은 사람이 8천여명 되는 것이다.

이들은 언제 미국으로 들어갔을까.

본격 집단 미국 이민이 이뤄진 것은 약 90년 전인 1903~1905년 사이 만2년여간이었다. 도착지는 일단 한국과 미국 본토의 중간에 놓인 하와이. 여기서'일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때 들어갔던 사람들이 곧이어 미국 전역에 퍼졌기때문이었다. 이 말은 이때의 이민자들이 하와이 뿐 아니라 미국 전역 우리민족의 이민 저층을 이룸을 얘기하는 것이다. 하와이 이민에 앞서 미국 본토로의 유학도 1881년쯤 시작되지만, 유학생은 1905년이 되도록 많이 잡아야70명 미만이었다. 또 유학 이민 전체인구 5백여명이래야 총이민의 10%도 안되는 것이었다.

하와이 이민이 이뤄지는 것은 때맞춰 이때쯤 번창하기 시작한 이 땅의 설탕농업 덕분이었다. 설탕이 가난하고 힘없던 우리 한민족에게 독립운동의 기지를 제공한 것이다. 참으로 세계사의 재미있는 인연이다.

하와이(1.6㎢)는 8개의 주요 섬으로 구성돼 있는 경상북도(1.9㎢) 크기 섬나라로, 얼굴이 가무잡잡한 폴리네시안들의 땅이었다. 이들은 지금으로부터2백년 전(1795)에 처음으로 통일왕조를 이뤄, 이 일대서 고래잡이 하는 백인 선단들에게 양식 등을 팔아 벌이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설탕농사가 가장 큰 수입원으로 부상한 것은 1835년쯤이었다. 사탕수수는 본래부터 이들의 식용식물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설탕을 뽑아내는기술이 이때야 개발됨으로써 산업화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다 1850년 전후에 가까운 캘리포니아 등 미국의 서부 개척이 시작돼 소비인구가 늘자 설탕산업은 날개를 달게 됐다.

이런 가운데 소수이던백인들이 1893년에 쿠데타로 폴리네시안 국가를 뒤엎고 백인 정권을 세웠다. 이들은 나아가 1898년엔 영토를 미국에 헌납했다.필리핀과 괌이 미국의 땅이 된 것과 같은 해였다. 그 결과 미국으로의 수출에 관세조차 없어지자 하와이의 설탕농사는 급성장했다. 생산량은 1876년 1만3천t에서 1898년 22만5천t으로 늘었으며, 1930년에는 2천6백만명이 먹을수 있는 1백만톤에 달하기도 한다.

설탕 산업의 발달은 동방의 작은 나라 우리 민족을 미국에 자리잡게 하는계기가 됐다. 설탕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이었다. 토박이들은출생률이 낮고 질병에 약해 오히려 인구가 감소,노동력을 수입할 수 밖에없게 된 것이었다.

하와이로 수입된 외국 노동력은 모두 38만5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돼있다. 또 백인들도 러시아-스페인-독일-포르투갈 등으로부터 수입되긴 했으나, 숫자는 2만명도 채 안되고, 힘든 농장일을 좋아하지도 않았다.그래서 수입된 노동력은 대부분 아시아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수입된 민족은 중국인이었다. 중국인은 1852년부터 진출하기 시작, 1884년에는1만8천명을 넘어 전체 노동자의 47%에 이르렀다. 초기에 들어온 중국인은 황무지에 물을 대 사탕수수 논으로 만드는 힘든 작업을 맡았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미국에서의 인상이나빠 1882년에 이민 금지법이 만들어짐으로써 미국합병 이후에는 하와이 이민이 중단됐다.

다음 하와이로 진입한것은 일본인이었다. 이들은 1886년쯤부터 정식으로집단 이민하기 시작, 1900년 현재 6만1천여명으로 전체 인구의 40%에 달했다. 그러나 일본인은 이민 직후 미국 본토로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많아 원망을 샀다. 이에 미국은 1924년에 아예 모든 동양인의 이민을 금지하는 법을만들기도 했다.

한국인 수입은 일본인에 대한 배척 감정이 높아가던 1902년에 추진됐다.그 결실은 이해 12월22일 첫 이민배가 출항한 것이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1903년1월13일. 23일간에 걸친 항해와 우여곡절 끝에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1백1명. 인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이들은 곧바로 하와이 8개 섬 중 호놀룰루가 있는 섬(오아후)의 호놀룰루 정반대 북쪽편에 있는 바닷가 모쿨레이아 지역 농장으로 배치됐다.

하와이 여러 섬 중에서도 가장 산업화된 이 오아후섬에서는 이제 사탕수수농장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데도 모쿨레이아 지역에는 넓은 사탕수수밭이 여전하다.

하지만,이렇게 시작한 우리 이민은 불과 3년만에 중단됐다. 그 자리는 필리핀인들이 차지했다. 1907년부터 시작해 12만명이나 들어갔다.한민족 1백1명의 첫 미국이민은 백인 1백2명의 첫 미국이민과도 비견될 수있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백인들은 그들의 첫 이민자 1백2명을 기념해서1백2층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건설했다는 점일 터이다. 1백1층의 기념물,아니 그보다 더 나은 것을 미국 바닥에 이루는 일은 이제 후손들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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