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국내 뿐 아니라 이웃 일본을 비롯 국제적으로도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있다. 한때는 구소련 등 사회주의권 국가에서도 다산을 주목했다.그를 초기 공산주의 이론가로 높이 평가하여 깊이 있게 연구한 것이다. 또 베트남의 호치민(호지명)도 관리의 부정을막기위해 다산의 목민심서를 애독했다고 한다.다산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평가는 일부 부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으나 대부분 극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실학의집대성자'다. 다산이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하는 이유는 정치·경제·사회·역사·지리·교육·천문·역학·의학·과학기술·언어 등관심을 갖지않은분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산을 아는 것이 조선 후기의 사회와 사상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다산은 1762년(영조38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 정재원의 넷째아들로 태어났으며 75세를 일기로 1836년(헌종2년) 세상을 떠났다. 다산의생애는 1801년 신유사옥으로 인한 유배를 기준으로 유배이전의 전기와 유배이후의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다산은 61세때 지은 자찬묘지명에서 스스로 정리하고 있듯이 방대한 저작으로도 유명하다. 대략 5백권으로 경집과 문집으로 나누어진다. 위당 정인보가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고 말한 이유가 짐작된다.따라서 다산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저서들을 모두 소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웬만한 연구자라도 5백여권에 이르는 저술을 모두 읽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결국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는 식으로 다산을 설명할 수밖에 없다.
다산이 5백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18년간 전라도 강진에 유배됐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유배를당하지 않고 중앙 관리의길을 계속 걸었다면 그처럼 많은 저작을 남길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관측이다. 특히 그가 유배당해 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던 조선조 후기의 사회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는 행운(?)이었다.그렇다면 다산이 느낀 당시의 사회현실은 어떠했는가. 다산의 산문에도 당시의 사회상이 나타나 있지만 그의 시는 참담한 현실을 더욱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를 통해 관리들의 수탈에 신음하던 민중들의 생활상을 살펴보자.
승냥이여,이리여 !/우리 소를 잡아 갔으니/우리 양일랑 그만 두어라./장안에 저고리도 없다. 옷걸이에 치마도 없다·/항아리에 남은 장도 없다./병안에 남은 쌀도 없다./무쇠솥, 가마솥을 다 앗아 가고/숟가락, 젓가락도 모두 가져갔다./도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데 /어째서 이다지도 착하지 못한가! (전간기사 중에서)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을 입었고/갓난 아인 배냇물도 안말랐는데/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붉은피 자리에 낭자하구나/스스로 한탄하네,아이 낳은 죄로구나·(애절양 )이 두 시는 모두 관리들의 혹심한 수탈과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상을 애절히 표현하고 있다. 특히 애절양은 군포에 시달리다 못한 남편이 자신의 생식기를 자르는 눈물겨운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에 다산은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 1표2서와 그의 수많은 저작을 통해 국가개혁방안을 제시한다. 이중에서 그의 전론과 탕론은 봉건 왕조시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사상이어서 주목된다.
그는 탕론에서 부덕한 제왕이나 군주는 언제나방벌할 수 있다는 맹자의역성혁명이론에 근거하여 정치혁명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 서울대의 신용하교수는 "다산은 원시 민주제 형식의 틀을 빌려서 아래로부터권력을 창출해나가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다"면서 "탕론·원목·원정 등에서분명히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있다"고 말했다.
다산은 정전제와 공동경작과 공동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여전제를 주창, 토지개혁에도 관심을 보였다. 정전제는 경세유표에서, 여전제는 전론에서 전개하는데 여기서 정전제와 여전제를 상세히 설명할 지면은 없다. 그러면 학자들의 평가를 들어보자. 영남대 정석종교수는 "여전제는 소극적인 토지개혁으로는 당시 농촌에서 유리되고 있는 수많은 농민들의 처지가 개선될 수 없다는 사상적 전환에서 창안된 것"이라며 "토지가 없는 농민의 이해를 보다 근본적으로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말했다. 신용하교수도 "여전제 토지 개혁안은 결코 공상적인 것이 아니며 마을 단위의 협동농장을 의미했던 것"이라면서 "다산은 두레 농법에 의한 두레 농장을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덧붙였다.
다산은 또 당시 청소년들이 동몽선습과 통감절요를 통해 중국역사를 먼저배우는 교육방식의 잘못을 지적했고 과거 과목에도 우리 역사가 빠져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다산은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천하의 중심이 중국일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 화이의식도 부쉈다.
다산이 살았던 조선사회의 18세기 말 19세기 초는 우리 중세사회 해체 최말기에 해당하는 극심한사회변동기였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광업분야 등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발생했고 일부 선진적 수공업 분야는 매뉴팩처 단계에까지 이르러 사회적분업이 정착해가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국가자체가 공노비를 해방하는 등 신분제의 해체가 이제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정치적으로는 경제·사회적 변화에대한 지배계층의 대응으로 탕평정치·세도정치가 행해지던 시기였다. 또 대외적으로는 청의 중원 정복이후 지속돼온동아시아의 오랜 평화가 서구의 침략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다산은 이러한 극심한 사회변동과 대외정세의 변화의 와중에서 여러가지 현실문제를 철저히 인식하고 체계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강진이라는 남도의 외딴 곳에 유배된 몸이었다. 〈조영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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