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政經혼란... 고전판 '빅뱅'

우리나라경제는 일제치하, 특히 2차세계대전중 줄곧 인플레 요인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경찰력을배경으로한 물가통제와 배급제도등으로 인플레현상은 그다지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나 1945년8월15일 해방과 동시에 상황은 급변했다. 안정기조를 뒷받쳐주던 행정력과 조직력이 붕괴됨으로써 걷잡을수없는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됐다.

또 해방으로부터 미군정이 실시된 9월8일까지 공백기간을 통해 일본인들은 금융질서를 여지없이교란했다. 8월15일 발행액이 불과 48억원(圓)이던 조선은행권은 4주만에 85억원으로 무려 37억원이나 남발됐다.

해방직후 남북단절로 전국 총3백34개의 금융기관 지점과 출장소중 북한지역과 해외점포가 폐쇄돼남한에는 1백64개소의 점포망만 남게된다. 또 경북지역에는 조선, 식산, 상업, 조흥, 저축등 5개은행의 지점 23개소, 무진회사 지점 5개소, 신탁회사 지점 1개소, 금융조합 본지소 96개소가 있었다.조흥은행은 해방당시 경북에 14개점포가 있었다. 해방5일뒤인 8월20일 영주지점 춘양출장소를 개설했으나 3개월만에 폐쇄했으며 6·25전쟁으로 포항, 왜관, 의성, 안동등 4개점포가 전화로 소실되고 대구를 제외한 지방점포는 일시휴업을 하는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1960년말까지 조흥은행은 대구, 대구동, 안동, 경주, 포항, 김천, 영천, 영주등 8개지점만이 남아 15년전보다 6개점포가 줄어들었다.

조선상업은행은 47년 대구시장정지점이 점포정비책에 따라 폐쇄된후 대구지점만이 존속되다 50년이름이 한국상업은행으로 바뀐다. 상업은행은 54년 김천지점을 설치했다 1년만에 폐쇄하고 이듬해 5월에는 시장정지점을 부활, 대구서지점으로 개점했다.

조선저축은행은 해방당시 대구, 포항, 김천, 상주, 안동등지에 대리점(식산은행 각지점내에 설치)을 두고 영업활동을 계속하다 46년 미군정 재무부에 의해 기존의 저축업무에 일반은행업무를 겸할 수 있게된다. 그후 전국의 식산은행 폐쇄점포를 승계해 점포망을 확충하게된다. 한국저축은행은 58년 현재의 제일은행으로 이름을 바꾸게된다.

현한일은행의 전신인 조선중앙무진과 조선신탁회사는 해방후의 급변하는 정치, 경제적 여건을 극복하기위해 은행으로 업종전환을 하게된다. 중앙무진은 46년 일반은행업무를 주업으로하고 무진업무를 겸하는 조선상호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한다. 그후 한국은행의 설립으로 인해 해산된 조선은행의 일부점포를 인수해 50년 한국상공은행으로 재출범한다.

조선신탁은 해방직후 계약해지사태, 일본인의 퇴거와 인플레로 인한 신규수주의 단절, 토지개혁설에 자극받은 부동산신탁의 해약급증 등으로 신탁업의 존립이 위태롭게되자 46년 조선신탁은행으로 전환하게된다. 또 50년에는 한국신탁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한다. 한국신탁은행은 그후 54년 한국상공은행을 흡수, 한국흥업은행이 된뒤 60년 한일은행으로 은행이름을 바꾸게된다.해방직후 도내에 5개점포가 있던 조선식산은행은 50년 한국산업은행으로 개칭한뒤 54년까지 대구를 제외한 김천, 상주, 안동, 포항지점을 폐쇄한다. 산업은행의 설립은 6·25로 인한 산업시설의복구지원을 위해 장기산업금융의 필요성이 대두된 때문이다.

해방전 유일한 발권은행이었던 조선은행은 50년6월 한국은행으로 개편된다. 이에따라 조선은행대구지점도 한국은행대구지점으로 바뀌게된다. 조선은행은 해방후 금융통제력을 상실, 통화신용정책을 주관하지못했다.

이에따라 50년 한국은행이 설립될때까지 금융정책은 각금융기관에대한 재무부 통첩형식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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