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대구를 포함한 한국금융은 대내외적으로 큰변화를 겪는 격동의 시기로 접어든다.안으로는 60년의 4.19, 61년의 5.16등 일련의 체제변혁 소용돌이 속에서 일관성이 결여된 정책으로 경제가 큰충격을 면치못했으며 밖으로는 50년대 후반기이후 우리경제의 안정과 성장의 밑받침역할을 해온 미국원조가 대폭 줄어들었다.
이같이 안팎의 시련이 겹친 상황하에서 한국 경제가 당면한 최우선 과제는 국제수지를 개선하고국내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조화있게 추진해 자립경제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이에따라 60년대초의 경제시책은 종래의 안정우선정책에서 성장우선으로 전환돼 62년부터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됐다. 또 62년6월10일에는 화폐개혁이 단행돼 종전의 환화가 원화로바뀌면서 호칭가치가 10대1로 절하됐다.
화폐개혁으로 새로 발행된 원화 화폐는 오백원, 백원, 오십원, 십원, 오원, 일원권등 모두 6종으로영국 '토마스 데라루'사에서 제조반입해 발행됐다.
그러나 주화는 발행하지 않고 종전의 환화표시 주화및 50환이하의 은행권을 해당액면의 원화로통용토록 했다.
이어 62년12월에는 소액거래에 있어 단수처리의 편의를 위해 오십전과 십전권을 발행했는데 이로써 원화체계는 8개권종으로 정비됐다. 화폐개혁 6년뒤인 68년에 이르러야 그간 통용되던 오십환,십환화를 대체하는 십원, 오원, 일원화등 원화표시 주화가 발행됐다.
또 경제개발 정책을 뒷받침하기위해 대대적 금융제도의 개편도 뒤따랐다. 휴전이후 경제성장이대기업위주로 이뤄짐에 따라 나타나기 시작한 중소기업의 정체를 해소하기 위한 금융정책의 일환으로 61년에는 중소기업은행이 설립됐다.
또 종전까지 금융구조에서 소외됐던 서민금융체제를 확립하기위해 국민은행이 63년 문을 열었다.국민은행은 한국, 한국중앙, 고려무진등 3개무진회사를 흡수 또는 매수합병한후 당시 서민금융기관으로 존재하고있던 한국국민은행을 합병해 설립됐다. 또 55년 설립된 대구무진도 흡수했다.65년에는 금리현실화 조치등 고도성장을 위한 내자 동원체제의 기반이 구축되고 60년대후반기 들어서는 수출증대및 외자주도형 고도성장이 진척됨에 따라 각종 특수목적 금융기관이 잇따라 설립됐다.
67년1월에는 한국외환은행, 7월에는 한국주택금고(지금의 주택은행)가 설립됐다. 또 이해부터는외국은행의 국내지점이 잇따라 개설됐다.
이와함께 67년은 지역금융사에 한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 해로도 기록된다. 67년10월7일창립된 대구은행의 출범이 그것.
일제시 토착민족자본에 의한 지방은행이 최초로 설립됐듯이 전국최초의 지방은행이 대구에 설립됐다.
대구은행의 설립은 일제의 압력으로 지방은행 상호간 합병과 통합으로 일제말기에 막을 내린 국내 지방은행사가 부활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한편 63년12월 서울은행 대구지점, 67년9월 외환은행 대구지점, 68년5월 주택은행 대구지점, 69년1월 신탁은행 대구지점이 각각 개점돼 이들 은행이 경북지역에 본격 진출하게 된다.이에 따라 경북도내의 금융기관 점포수는 60년말 18개(농업은행 90개점포 제외)에서 70년말까지54개로 불과 10년사이에 3배나 증가했다.
〈池國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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