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주 남산-탑자리

모처럼 내린 비로 산이 흠뻑 젖어 있다. 남산자락 나지막하게 자리잡은 집들마다 담너머로 붉은얼굴을 내민 장미꽃들이 더욱 싱그럽다. 때아닌 더위에 산도 꽃도 탑도 모두 지쳐있다 비로 인해다시 태어난듯한 느낌이다. 낮은 먹구름아래 비 갠 남산의 신록은 푸르다 못해 검기까지 하다. 계절이 변함에 남산도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서두르는 기세다.옛 신라인들은 왕경에서 남산을 올려다 보았고, 남산에서 왕경을 내려다 보았다. 하늘과 땅처럼하나된 조화의 세계. 신라라는 대우주안에 이웃해 자리잡은 두 은하계처럼 왕경(王京)과 남산(南山)은 신라인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신앙으로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왕경의 평안을 빌기 위해 남산에 찾아든 신라인들을 맞이한 것은 다름아닌 석불과 절과 탑이었다. 온갖 정성을 쏟아내 이룩한신앙의 대상이었다. 하늘의 수많은 별자리처럼 남산 곳곳에 흩어져 떠있는 탑은 남산이라는 천체의 중요한 핵이다. 많은 탑이 허물어졌지만 이제까지 알려진 71기의 남산의 탑가운데 상당수가왕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봉우리나 산중턱에 세워져 있다. 왕경내 세워진 많은 탑과 남산의 탑은 자리가 다르다. 이 점이 남산 탑의 존재이유를 풀 수 있는 열쇠다.

포석골 늠비봉 석탑과 용장사지 삼층석탑, 탑골 삼층석탑, 틈수골 천룡사지 삼층석탑…. 남산에우뚝한 이들 탑들은 후대 사람들에게는 쉽게 풀 수 없는 의미를 안고 있다. 천년세월동안 그 신비가 묻혀진 것이다. 옛 선인들이 희구했던 불국정토의 꿈이 단절된 때문일까. 옛 신라의 꿈을 되밟아 남산을 오른다. 서남산 용장골에 들어 동북쪽 산봉우리를 올려다보면 바위산위 삼층탑이 아득하게 걸려 있다. 용장사지 삼층석탑. 탑은 망망대해 섬처럼 떠 있다.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이마치 하늘 깊숙이 파묻힐 것만 같다. 구름처럼. 기단하부에서 삼층탑신 꼭대기까지 채 5m도 되지않는 작은 탑에서 형언할 수 없는 장엄함이 풍겨난다. 하늘세계와 연결되는 감격이다. 이같은 아름다움은 그 어떤 재주로도 나타낼 수 없고, 힘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신라의 안녕과 불국의 의지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부엉골(포석골) 깊은 곳에 풍진세월에 마치 주저앉듯 무너져내린 늠비봉 석탑이 왕경을 내려다 보고 있다. 하늘도 탑도 세월도 아득하다. 하늘과 맞닿은 이토록 높은 곳에 왜 탑을 이룩하였을까. 무거운 탑재를 산위에 올린 그들의 숱한 땀과 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를 일이다.

오랫동안 허물어져 땅에 누워있다 몇해전 복원된 천룡사지 삼층석탑에서도 똑같은 의문이 남는다. 경주에서 봉계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틈수마을에서 골을 따라 1시간가량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문득 시선이 확 트이며 땀을 씻을듯 청량감이 밀려온다. 산속 평원. 널찍한 개활지에 절을세웠다. 고위산 정상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흘러내린 천룡골의 대가람인 천룡사다. 사천왕사, 망덕사와 함께 7세기말 이전에 세워진 이 절은 이제 넓은 절터에 삼층석탑만 남아 옛 영화와 숨결을얘기해주고 있다. 뒤로 하늘과 푸른 송림의 고위산이 버티고 섰고 서쪽 발아래 이조(伊助)평야가넓게 펼쳐져 보인다. 멀리 박달리(朴達里)의 고만고만한 산들이 아물아물 하계의 산들처럼 아득하게 보인다. 넓고 아늑한 터에 자리잡은 삼층석탑. 법당으로 짐작되는 터앞에 황금비율로 솟아오른아름다운 탑이다. 천년이 넘는 시간의 흐름에도 탑은 서라벌사람들의 꿈을 전해주고 있다.비록 지금은 허물어지고 넘어졌지만 수많은 남산의 탑들이 다시 솟는 날, 남산과 신라왕경, 신라인의 꿈이 서로 얽혀있는 함수관계는 비로소 풀릴 것이다. 남산의 탑은 하늘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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