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화장실 앞에 서서 문에다 손을 대고 있는 그림. 45년전 국민(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실려 있던 그림이다. 교사가 물었다. 이 아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 손들어. 내가 들었다.나는 '천자문'과 '소학'까지 달달 외고 국민(초등)학교에 들어가 있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변소 문을 열려고 하고 있습니다"
틀렸다, 이 아이는 지금 '노크'라는 것을 하고 있다. '노크'가 뭔데요? 도시 사람들은 변소 앞에서마른 기침으로 기척을 내는 대신 손등으로 문을 똑똑 두드리는데 이것을 '노크'라고 한다, 알겠느냐? 모르겠는데요?
'노크'라는 말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시절의 나는 노크라는 말은 물론이고, 도시의 변소의 문이나무로 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학교 화장실 문까지 거적대기로 되어 있던 시절이었다.그때 나는 작은 상처를 입고 어린 마음으로 예감했다. 노크해야 할 것, 배워야 할 것이 많겠구나싶었다. 군위군에 있는 우보국민(초등)학교 1학년때의 일이다.
4학년 때 대구로 나갔다. 대구말 배우기가 시작되었다. 겨우 백리를 상거해 있는데도 군위와 대구는 말이 엄청 다르다. '어매'와 '어무이', '누부야'와 '누나'의 차이, 이것이 군위말과 대구말의 차이다. 나는 대구스럽게 말하느라고 형수를 '아주머니'라고 불렀다가 대구살이를 몇년 더한 종형으로부터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인마, 대구도 경상도야. '아주머니'는 칠성시장 콩나물 장수나 부르는데 쓰는 말이고, 형수나 숙모는 대구에서도 여전히 '아지매'야"
내가 기억하는 두번째 상처다. 다른것도 많지만 같은 것도 많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나는굳이 대구사람 행세를 하지않고 군위 사람에 머물러 있어도 사는데 별로 지장이 없겠다는 것을알았다.
67년 겨울, 진학을 겨냥하고 상경했다. 사투리 컴플렉스는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 오히려 대구 내려가는 나를 보고, 시골가니, 하고 묻는 서울 친구에게, 임마, 대구가 왜 시골이야, 하고 공격적으로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한 서울출신 교수의 다음과 같은 글은 나를 얼마나 골나게 했던가?"문화사 강의를 들으러 갔지만 교수의 첫 마디에 절망한 나머지 강의실을 나오고 말았다. 교수의강의는 '문화라 카는 거슨'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는데, 나는 사투리로 강의하는 문화사를 믿을수없었다"
나는 이 교수의 글에 동의할 수 없었다. 문화가 무엇인데? 나는, 사람의 동아리라고 하는 것은 규모가 크건 작건 동아리가 공유하는 잠재력으로부터 특정한 요소를 선택하고, 이로써 단순하든 복잡하든 나름의 정교한 실존적 습관을 빚어내는데, 동아리의 이러한 습관이야 말로 아무리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동아리에서는 결코 빚어지지 않을 만큼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 정의가 너무 복잡하다면 거꾸로 이렇게 간단하게 말해 버릴 수도 있다. 사투리도 일종의문화다. 의사 소통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사투리는 곤란하겠지만 소통 너머 존재하는 사투리는 일종의 언어문화 유산이다. 미국에는 30, 40년전에 서울 말 경험하지도 않고 대구에서 바로 미국으로 건너온 대구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원판사투리를 나는 대구 사투리의 화석이라고 부른다. 나는 언제, 밤새 들어도 정겨운 이 사투리 어휘와 억양을 채집해서 어디에 기증이라도 하려고 한다.긴 서울살이에도 나는 경상도 사람이었듯이 91년부터 시작된 미국살이에도 나는 여전히 토종 한국인이다. 국지적 사투리 문화는 내 인생의 뒷심이 될 지언정 장애물은 안된다. 내게는 어머니 말고도 '어매'와 '어무이'라는 어휘가 더 있다. '어머니'로 대체될 수 없는 '어매'의 문화, '어무이'의 문화가 내게 있다. 숲 짚(깊)은데 토째비(도깨비) 살고 물 깊은데 큰고기 사는법. 텔리비전이평준화시키는 문화, 경망하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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