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백산맥-전북 무주

추풍령을 지나 소백산맥의 긴 허리를 타고 남으로 곧장 내려오면 민주지산,삼도봉등 준봉으로 이어지고 막 땅의 경계를 넘어서면 바로 전북 무주땅이다.

덕유산으로 인해 자연스레 땅의 경계가 만들어진 무주는 북쪽으로 충북 영동군,동쪽으로 경북 김천과 머리를 맞대고 있고 남으로 경남 거창군과 이웃하고 있다. 광대한 덕유산을 가슴에 깊숙이 안고 살아온 이유만으로 항상 고단하기만했던 삶의 현장,무주(茂州).무주는 노산으로도 불리는 덕유산을 끼고 있어 북한의 삼수갑산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오지의 대명사로 손꼽히던 지역. 전형적 산악지대라 진안,장수군과 함께 첫 글자를 따서 '무진장지구'로 일컬어 진다. 산좋고 물좋다는 구천동은 바로 무주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산맥은 덕유산을 잉태하고 해발 1천m를 넘는 고산준령들을 즐비하게 뿌려놓아 무주의 독특한 지세를 이룬다. 만악천봉(萬岳千峰)이다.

물은 잇고 산맥은 가른다고 했던가. 소백산맥은 덕유산에 이르러 사람사이를 막아선다. 이질적인 언어와 풍속을 만들어내고 판이한 기질과 사고방식을 차별한다. 이 때문에 무주는 역사적으로 두 문화권이 충돌하는 요충지였다. 적상,설천,안성,무풍등 곳곳에 형성된 분지(盆地)를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대흐름에 따라 불안한 삶을 지탱해 왔다. 무주군 설천면소천리와 장덕리 사이 해발 3백10m 석견산의 바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나제통문(羅濟通門)에서 시간의 벽을 확인한다.

무주구천동 33경중 제1경으로 불리는 나제통문. 넉넉한 물과 짙푸른 수목들로 한폭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설천면과 무풍면의 경계를 이룬 이 통문은 일제시대인 1928년에 뚫려 설천굴로 불렸으나 통문 동쪽에 위치한 무풍면이 신라땅,서쪽이 백제땅이라는 유래에 따라 지금의 이름만 남았다. 하지만 그 옛날 신라,백제사람들은 지금도 통문 옆에 고스란히 남아있는옛 길을 따라 기어넘는다는 뜻에서 '기네미'로 불렸던 이 바위산을 오르내리며 국경을 넘나들었다.

사람들은 오고갔지만 1천여년의 세월이 흘러 같은 행정구역에 속하면서도 이 문을 경계로동서 양 지역은 언어와 풍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멀지않은 옛날에는 혼례절차나 장례절차에서부터 모든 예법이 서로 달랐고 때로는 같은 군 안에서도 혼인이나 상거래도 하지 않을만큼 지역감정의 대립이 심한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전북땅이면서도 통문 동쪽 무풍면 사람들은 김천이나 거창쪽과 왕래가 잦은 편이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무주산악회회장을 맡아 틈나는대로 무주 인근의 산들을 찾아나서는 박남수씨(44·신라오릉보존회 무주지부장)는 무주사람,무풍사람을 쉽게 구별해낸다. "무풍사람들은 한마디로 다르지요. 이곳사람들은 삼국시대때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같은 전북사람이지만 말이나 풍습,기질이 경상도에 더 가까워요"

밀양 박씨라고 자신의 본향을 소개한 박씨는 조선시대때 난계 박연선생의 후손들이 영동 심천에서 금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일부는 무주에 정착해 살고있다고 집안내력을 들려준다. 박씨 종친회격인 신라오릉보존회 지부일도 맡고 있는 박씨는 해마다 경주에서 열리는 제사에참석하는등 비록 그 옛날 백제땅,전라도 사람이지만 경상도에 뿌리를 둔 탓에 강한 동질의식마저 엿보인다. 무풍면은 오는 99년 경북 김천시 부항면과 새로 연결된다. 경북과 전북땅을 잇는 부항~무주간 6.5㎞의 도로가 개설되기 때문이다. 험준한 산악지역인 도경계지점은터널로 뚫릴 예정이어서 멀잖아 제2의 나제통문이 생기는 셈이다.

나제통문에서 치마령을 넘어서면 붉은 치마처럼 단풍이 곱다는 뜻에서 적상(赤裳)이라 이름한 무주군 적상면에 이른다. 이곳에서 또 다른 시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려말 최영장군이 거란과 왜적을 막기 위해 축성했다는 적산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험한산세를 이용해 5㎞둘레의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을 막고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한 것이다.하지만 그 든든하던 산성도 세월의 무게를 못이겨 허물어져 있다. 근래들어 흩어진 석재들을 다시 모아 정비하면서 산성임을 한눈에 알수 있다.

지난 95년 무주양수발전소 건설로 해발 1천m에 가까운 산정에 인공댐이 들어서면서 고려충렬왕때인 1277년에 세운 고찰 안국사(安國寺)가 산위쪽에 다시 중창되기도 했다. 1910년까지만해도 안국사 경내에는 조선왕조실록을 옮겨 보관했던 적상산 사고(史庫)인 '선원각'이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라의 중요한 사서를 보관할만큼 지형적으로 외적의 침입이 어려운 오지라는 점에서 무주의 지리적 위치와 비중을 충분히 알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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