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최송설당 여사(上)

경북 김천이 낳은 최송설당(崔松雪堂·1855~1939)여사는 투철한 민족관을 갖고 일제치하에서 2세들을 교육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백년대계를 이어갈 동량(棟樑)을 키워낸 위대한여성 민족운동가이다.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사립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 중·고교)를 설립, 3만여명의인재를 길러낸 송설당 최여사는 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고취시킨 동양의 여걸로 청사에 기록되고 있다.

최송설당의 가문은 대대로 조정의 중직을 지내던 명문이었으나 증조부때 외가가 홍경래의난에 가담한 탓으로 연좌제에 몰려 몰락하고 말았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무너진 집안의무남3녀의 맏딸로 태어난 그는 가원(家寃)을 갚고자 결혼도 하지 않은채 평생동안 치부에힘쓴 대단한 맹렬여성이었다.

철종 6년(1855년) 8월29일 경북 김산군(金山郡) 군내면(郡內面) 문산리(文山里), 현 김천시문당동에서 태어난 그는 누에치기·명주짜기·삼베짜기·삯바느질로 상당한 돈을 모은 뒤1894년 39세때 서울에 올라갔다. 정부 고위층과 가깝게 교제하기 위해서였다.

경운궁(慶雲宮) 부근인 무교동에 집을 정하고 엄상궁의 친정아우와 깊이 사귄 그는 1897년엄부인을 통해 엄상궁의 출산에 따른 제반 물품을 미리 준비해놓았다가 바쳤다. 고종이 이를 가상하게 여기고 친히 접견을 한 뒤 왕세자 은(垠)의 보모로 명하면서 내려준 '송설당'이라는 당호가 뒤에 당신의 호로, 나아가서 이름으로 굳어졌다.

장하면서도 순하고, 엄하면서도 굳세며, 너그러우면서 분명한 판단력을 지닌 송설당(초상화참고)은 1901년 고종에게 상소, 집안이 몰락한지 89년만에 신원받을 정도로 대단한 의지를가진 여성이었다.

우리나라 초창기 교육사에 있어서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송설당 여사가 육영사업에전 재산을 희사하게 된 것은 1908년 어머니가 운명하면서 '부재(浮財·넘치는 재산)를 육영에 써라'는 유언에 따라 원래도 검소한 생활비를 더욱 줄여쓰며 뒷날의 큰일에 대비했다.엄비(서울 양정·진명·숙명학교 설립자)의 영향으로 여성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송설당은1917년 김천공립보통학교에 기부금을 냈고, 금릉유치원 및 금릉학원에데고 기부금을 냈다.64세이던 1919년 김천 고성산록(현 김천중·고등 뒷산)에 정걸재(貞傑齋·일명 고부재실)를지었으며, 1929년 32만원을 쾌척, 1931년에 경상북도 김천 고등보통학교를 세웠다. 32만원은요즘으로 치면 수십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당시 서울의 백미 상품 1섬이 29. 77원할때였으니 1만섬 이상을 살 수 있는 거액이었던 셈이다.

국내에 남아있는 민족지사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으로 교육에 대단한 뜻을 둔반면 3·1운동을 겪었던 일제는 식민지정책의 하나로 되도록이면 한국인들에게 학교를 설립하지 못하도록 했다.

마지못해 학교설립을 허가해주어야 하더라도 인문계가 아닌 실업고교만 인가를 해주었다.송설당은 실업고로 하자는 경북도청의 권유를 끝까지 뿌리치면서 "청년들로 하여금 대학교육을 받게하기 위해서 이 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인문고가 아니면 절대곤란하다"고 끝까지밀어붙여 1931년 5월9일 사립 인문계 김천고등보통학교를 도내 처음으로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일제 치하 여성운동가들이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던데 반해 유일하게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점도 특색이었다. 1912년 전국 유명사찰 30본산에 불기와 불등을 봉헌할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고 한다. 이밖에 그는 국문학 가사와 한학에도 능통하여 '송설당집'을 남긴 여류문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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