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통마을을 찾아서-영주 이산 우금마을

영주시 이산면 신암2리 내성천을 따라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우금(友琴)마을. 지명은 마을 앞산 줄기와 뒷산 모양이 천사가 거문고를 타는 형상과 같다 하여 붙여졌다. 새악시 고운손으로 빚은 듯 구릉이 아름답기 이를데 없고 맑은 내성천이 적시는 기름진 주변 들녘은 풍성한 곡식을 남긴다.

선성 김문 문절공 김담의 현손인 윤의의 둘째아들 두암 김우익이 1590년대 영주의 종갓집인 삼판서고택에서 살림나 이곳에 입거했다. 광해군 초에 문과에 급제해 황해도사를 지낸 선생은 1616년 영월군수 재직시 산에 밭농사만 지으며 살던 주민들에게 처음 벼농사를 보급했고 해미(지금의 서산)현감으로 부임해 피폐한 민생의 안정을 위해 베푼 치적은 지금도 칭송받고 있다.

마을에는 내성천변의 넓은 들판을 맞보며 남향으로 지은 두암고택이 있다. 이 고택은 口자형 몸체 24칸, 함집당 6칸, 사당 6칸으로 이루어져 있고 정침은 두암선생이 20세에 분가할 때 건립했다.

선성 김씨 입향후 문과급제 9명, 생원과 진사급제 24명을 내는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두암선생의 증손자인 가주와 만주, 동주 3형제가 모두 생원시에 합격하고 둘째 만주는 문과에 급제해 당시 영남 유림에서는 드문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도학자로 실학에 밝아 명성을 떨쳤던 운학재 김한주도 이 마을 출신. 그는 영조때 이인좌의 반모 기미가 일어 암행어사 박문수가 영남 사대부들의 조짐을 듣고자 찾아 왔을 때 지체않고 임금께 반역을 고하라는 뜻의 시(詩) 한수를 읊어 대답을 대신했다는 '설창문답(雪窓問答)'으로 유명하다.

치암 김석규는 고종때 서양의 조선책략을 비판하는 영남 유생 만명의 만인소 사건때 수장격인 이만손과 함께 임금에게 소를 올리는 과정에서 끝까지 대궐앞에서 상소하다 덕천으로 귀양을 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마을 선성 김씨 문중에서는 지금도 제사 때면 익히지 않은 음식을 올린다. 이는 혈식군자(血食君子)의 의식을 실천하는 예도를 따르는 것이라 한다.

예부터 토지가 기름져 넉넉하며 사대부가 많이 살았고 인접한 멀엄마을, 삼봉골과 함께 집집마다 시와 책을 읽으며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곳이라 하여 '반(半) 서울'이라고 불렀다.

봉화.김진만기자 fact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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