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는 사상은 있어도 철학이 없다'는 말은 근대 철학을 확립한 자부심에 차 있는 서구인들의 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겐 이 말이 해당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과 우주론 등을 다룬 성리학의 새 지평을 열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비롯한 쟁쟁한 유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퇴계에 대한 연구는 서구사회로까지 크게 번져 21세기 현대인의 정신적 공황을 치유할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중국까지도 마찬가지다.
▲베이징 사회과학원 가오치샹 원장, 동방도덕연구소 왕덴칭 소장 등 중국의 대표적인 인문사회과학 국책연구기관 관계자 8명이 최근 영주.안동 등을 찾았다. '이제 유학의 본고장은 한국'이며 '중국의 국가 발전을 위해 한국 유학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털어놓은 이들은 최근 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유교 교육의 이상적인 모델이 한국의 유학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유학의 발상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중국이다. 우리는 고려 말 안향(安珦)이 혼란스러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처음 유학을 도입했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이 퇴계.율곡 등에 의해 찬연한 꽃을 피웠다.
더구나 학문과 정치가 일치했던 시대적 특성상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학의 학맥을 이은 인물들이 크게 부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100여년 전부터 서양식 교육.문화.경제 등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 전통이 거의 단절된 모양이다.
▲이들 일행은 영주 소수서원과 안동 도산서원 등을 둘러본 뒤 '중국의 추로지향(鄒魯之鄕)에는 생명 없는 유물만 남아 있으나 한국인들에게는 유학이 삶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고 감격했다 한다. 특히 사람답게 사는 도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중시하는 유교 윤리가 살아 있다는 데 자극을 받았다고도 한다.
아무튼 이제 중국이 거꾸로 한국의 유학을 수입해 국가 발전의 모델로 삼는 아이러니를 목도하게 됐지만, 차제에 생각해볼 문제들도 적지 않으리라고 본다.
▲퇴계와 율곡의 사상에는 민본주의 원리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주장한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는 지금도 여전히 경청할 대목들이 아닐 수 없다. '자리'를 탐하고 출세가 지상의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현대인들에게 학문과 윤리로 무장한 옛 선비들의 대쪽 같은 정신은 여전히 '청풍(淸風)'이며, 정신적 지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제 유학의 원산지였던 중국까지 우리 유학을 재수입하는 상황이지만,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선현들의 시공을 초월한 '빛나는 정신'이 행여 멀어져 있지나 않은지, 자성해볼 일이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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