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다시 꺼내든 핵 카드

미국 백악관은 북한이 농축 우라늄을 사용한 비밀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다고 16일 공식 발표했다. 이에 따라, 최소한 당장은 북미관계는 물론 북일관계, 남북관계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북미 제네바 합의에 따른 경수로 건설이 중단되고,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 역시 당분간 표류할 수밖에 없으며, 경의선 복원 등 남북간 경협 프로젝트들의 진전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특히 국내적으로는 현정부가 햇볕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시점에서 북한이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을 진행시켰다는 점에서, 현정부의 대북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다가오는 대선 정국에서 주요 쟁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북한은 왜 일체의 핵 의혹을 완강히 부인하던 기존의 입장을 뒤집어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을까? 물론 켈리 미 특사와의 언쟁 중에 강석주 북한 제1외무부상이 홧김에 '공갈용'으로 내뱉었다거나 의사소통에 오해가 있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또 미국의 물증 제시가 워낙 구체적이어서 시인할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간에 보여준 북한 외교의 노련함을 감안하면 이 시인은 잘 계산된 의도적 발언일 확률이 크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마술의 탄환(magic bullet)'으로 간주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및 기타 서방 세계로부터의 경제적 원조도 기대할 수 있게 하며 체제를 견고히 할 수 있는 가시적 외교성과로도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북한은 남북관계의 개선을 통해 북미관계의 개선을 도모하는 전략을 시도하고 있으나 근본적 한계에 부딪히고 있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일 국교 정상화 교섭 역시 미국이 반대하는 경우 의미 있는 진전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과거에 핵 카드를 사용함으로써 결국 미국과의 제네바 합의에 도달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핵 카드를 이용하여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달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방북시 북한이 일본인 납치문제를 솔직히 시인한 것이 북한이 일본과의 수교를 절실히 바라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되듯이, 이번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시인은 북미관계의 개선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북한으로서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한 이상, 북한의 입장에서는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전면적인 핵사찰을 받지 않고서는 북미관계의 진전은 물론 북일관계의 실질적 진전 역시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고사(枯死)하지 않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경제원조 및 투자가 절실하다는 것을 북한은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한은 그 장기인 벼랑끝 전술을 사용하여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서 받을 실질적 이득을 극대화하려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은 수시로 고조될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인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이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핵을 궁극적으로 포기할 각오까지 하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려 한다는 위 추정이 옳다면, 강경한 부시 행정부에 북한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양보를 할 가능성도 크다.

위 추정과는 다르게 미국이 핵 개발의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여 북한이 할 수 없이 시인한 것이라 해도, 문제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북한이 좀더 완강하게 버틸 것이라고 예상된다. 어쨌든 이번에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북한이 혹시라도 이미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핵을 철저히 규명하지 않거나 핵 의혹시설을 그냥 덮어두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이럴 경우 한반도에 핵을 둘러싼 위기가 조만간 또다시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벼랑끝 전술을 구사할 때는 우리도 때로는 벼랑 아래로 떨어질 위험을 무릅쓰고 벼랑끝으로 한 걸음 더 옮겨갈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한.미.일 3국이 공조하여 이런 자세로 이번 북한 핵 문제를 대한다면,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대폭적으로 완화하고 북한을 개혁과 개방으로 이끄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정준표 영남대교수 정치학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