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1일이면 옷거리 좋은 예쁜 여자의 전신상을 찍은 다음 그 위에다 요란한 광고 문안까지 덧댄 표지를 시중의 서점들마다에 선보이고, 그 제호명도 외국것을 빌려온 것이지만 각종 상품 광고로 500쪽 안팎의 지면을 반 이상 채우는 젊은 여성용 잡지를 발간하는 회사의 편집실 안이다.
잡지사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새 달의 잡지를 시중에 깔아놓은 후 1주일쯤은 태풍이 휩쓸고 간 시장바닥처럼 말간 정적이 감돈다.
그러다가 마감일을 보름쯤 앞두고부터는 편집실 소속의 모든 직원은 고지를 기한내 점령해야만 하는 병사들처럼 야근이다, 철야다 로 온통 북새판을 벌이는 것이다.
아까부터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른바 벽걸이용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는 화려한 패션쇼가 펼쳐지고 있다.
팔등신 미녀들이 연방 엉덩이와 어깨를 리드미컬하게 흔들어대며 걸어나왔다가는 우쭐 멈춰서서 제가끔의 빠곰한 눈길에 힘을 모운다.
가끔씩 그 눈부신 패션쇼에다 건성의 한눈을 팔다가도 문득 무슨 아이디어라도 떠올랐다는 듯이 책상 위의 개인용 수첩에다 메모도 하는 일방 그 밑에다 밑줄도 그어대곤 하는 우행숙은 시방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잡지 편집을 총괄하는 아트 디렉트로서 그 깔끔한 업무처리 능력만큼은 베테랑으로 소문이 나 있을 뿐만아니라 연전에 전격적으로 해치워버린, 그러니까 초상권 남용에 관한 자문을 구하느라고 몇번 만나다 사귄 지 불과 150일만에 평생 반려로 맞이한 신랑이 한 살 연하의 변호사이기도 하다.
새해가 밝았으니 둘의 신혼살림도 이러구러 세 해째로 접어든 셈이지만, 아직 둘 사이에 아기는 없다.
그렇다고 둘다 아기낳기와 자식키우기를 무슨 부담으로 여기는 처지는 아니고, 이태쯤 후에 곧 행숙이 삼십대 중반을 넘길 그 임시에나 딱 하나를, 그것도 가능하다면 딸 하나를 낳아 키우고 싶다는 작정을 해두고 있느니만큼 피임을 착실히 실천하고 있다.
따라서 대개의 신혼부부들이 그렇게 꾸려가지 않나 싶은데, 두 배필도 때맞춰 잠자리에서의 볼일을 볼 때는 남자쪽에서 소위 제2의 피부라는 투명한 고무장화로 용처를 중무장키시고나서 배밀이짓에 열을 올리며, 한 갑에 12개들이인 그 도구를 미리미리 챙기는 일은 전적으로 변호사의 몫으로 못박아두고 있는 터이다.
아무튼 점점 막연해지고 안타까운 심정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행숙이 자신의 제반 여건이나 능력 따위가 성에 안 차서 짠한 기분에 휘말려 있다.
마침 정오를 알리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사무실의 정적을 일깨워 놓는다.
다들 고만고만한 정초 무드에 휘감겨서 이런저런 궁리를 일삼다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일어서고, 대형 벽걸이 텔레비전 화면도 이내 그 뿌연 맨바탕을 드러내고만다.
동년배이자 패션 담당 책임자인 임이 다가와서 행숙에게 다소곳이 말을 건넨다.
"언니, 점심 안 먹어? 또 뭘 먹지, 이 동네 먹을거리는 정말 너무 따분해".
임은 제 전문분야가 그것이기도 해서 그럴테지만 아무 옷이나 걸쳐도 척척 어울리고, 꽤나 선정적인 화장발도 잘 받는 뽀얀 피부의 미인인데도 혼기를 무작정 늦추고 있는 명색 커리어 우먼이다.
"벌써 밥때야? 밥 생각이 아직은 좀 그런데. 혼자 먹고 와, 올 때 편의점에 들러서 세모돌이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하나 좀 사줘, 응?"
행숙의 수첩을 힐끔 곁눈질하고 나서 임이 소탈하니 되묻는다.
"아하, 지금 신년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데 내가 방해를 했나 보네?"
"뭐, 계획이라기보다 이것저것 간추려보고 있어. 넌 올해 소원이 뭐야?"
"글쎄, 소원? 그거야 백말 탄 웬 기사가 성큼 나타나서 나를 어딘가로 호려가는 거겠지 뭐. 연래의 내 소원이 그것밖에 없다는 거야 막상 나보다 주위 사람들이 더 챙기고 있을걸?"
"예전의 백말이 요즘은 자동차잖아, 그거야 별거도 아니고 그것도 없는 남자야 별볼일 없는 썰렁이일테지. 정말 소원이 그것 하나밖에 없어? 왠지 엉망으로 썰렁하다, 안 그러니?"
"그래도 내 소원은 그것뿐일걸. 언니, 왜 그래? 정월 초이튿날부터 평소의 언니답잖게 웬 소녀적 센치야. 너무 낯설어".
"이제 난 그런 소원마저 없으니 아주 망했나봐".
"원, 별소릴 다 듣겠네. 언니는 소원이 너무 많아서 탈일걸. 여기 적어놓은 것만 봐도 그렇잖아? 시간관리 엄수, 한달에 양서 두권씩 꼭 독파하기, 눈 보호, 요통 근절을 위한 스트레치 체조를 매일 20분씩 실천하기 등등 신년 계획이 착실도 하네 뭐".
"그런거야 나 자신에 대한 도리지키기지 막상 소원과는 다르잖아. 어제 벌건 대낮에 우리집 서방님과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가 결국에는 각자의 소원 털어놓기 끝에 입씨름을 좀 했어".
"서로 소원을 털어놓기로 하다가 입씨름까지나? 그것 적잖이 재미있는 화두겠네. 잠시만, 내가 샌드위치를 사올테니 그거나 나눠먹어면서 언니네 사랑싸움을 엿듣기로 하지 뭐".
"뭐 별거도 아니야. 어서 갔다 와".
정월 초하루인데도 간밤의 망년회 술독을 삭이느라고 오전 내내 소파 위에서 베개만 끌어안고 뒹굴던 지 변호사는 오후 1시쯤에야 행숙이 끓여낸 떡국을 후루룩거리면서 게슴츠레한 눈을 연방 껌뻑거리고 있었다.
서로가 한창 연애에 열을 올리고 있던 당시에는 그의 숱많은 머리털마저 무슨 대단한 매력으로 보였건만 이제는 그것이 짚북데기처럼 흉측스럽게 비쳤다.
그때 마침 집 전화가 울렸고, 행숙이 받아보니 상대방은 지 변호사와 대학 동기생이자 고시 동기생이기도 한 정 검사였다.
서울 근교의 어느 지청에서 근무하는 정 검사는 그 카랑카랑한 음성과 너름새 좋은 말솜씨가 시원시원하기 짝이 없는 호남자여서 행숙도 은근히 기리는 터였다.
다짜고짜로 내민 정 검사의 전언은 제 단짝 친구 지 변호사의 몸뚱아리를 오후 두시부터 밤 열시까지만 양도하라는 반공갈조의 강청이었다.
왜 그러냐니까 역시 알만한 지 변호사의 친구 세 명이 시방 정 검사 자신의 집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면서 오후 일곱시까지 마작을 하고 난 후 신년회 술판을 벌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제 서방짜리가 엄처시하라고 놀림이나 받을까봐 행숙은 선뜻 그러시라고, 자기 서방님의 몸쯤이야 자정까지라도 대여해서 마음대로 써먹어시라고 내물렸다.
정 검사는 곧장 고맙다면서,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이 "우리 제수씨도 올해는 꼭 소원 성취하십시오"라고 정중한 덕담을 건넸다.
그 탁트인 정 검사의 음성이 너무 듣기 좋아서 그녀는 한동안 푹해지는 마음자리를 다독이다가 알듯말듯한 그 '소원성취'란 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곱씹었다.
회색 캐시미어 반코트의 앞을 가르며 실내로 들어온 임이 "아이, 추워, 눈이 올라나봐" 어쩌구 지껄이며 행숙의 의자 옆자리에 앉자마자 샌드위치가 들앉은 플라스틱 용기를 열고 두유팩에다 빨대를 꽂아 죽이 맞는 제 등료에게 공손히 건넨다.
"언니도 정초부터 낭군님과 말싸움을 다했다니 믿기지 않아. 밑져야 본전일테지만 말 잘하는 변호사 신랑에게 말싸움을 건 것도 가당찮은데. 그 내막이 뭐야?"
"우리 지 서방이 올해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든 토끼 같은 딸이든 아이를 꼭 갖고 싶은 게 소원이라며 자기 친구들한테 외고 다니나봐. 남자들 속내는 도통 알 수가 없어, 겉 다르고 속 다른가봐. 언제 낳든 애낳기는 전적으로 나한테 일임하겠다 해놓고설랑 이제 와서 그런 딴소리를 광고하고 다니니 이게 무슨 망신이야.
자기 친구들이 날 뭘로 보겠어. 애도 못 낳는 돌녀거나 애키우기도 싫어하는 엉터리 여편네로 알거아냐. 나원, 정초부터 지 마누라 망신만 시키고 돌아다니니 그게 도대체 무슨 돌팔이 서방님이야. 사람 열받게".
"언닌 그 광고를 누구한테 들었는데?"
"그이 단짝 친구에 정 검사라고, 음성이 아주 낭랑하고 부드러운 남자가 있는데 그이가 그러대. 제수씨, 올해는 지 변호사 몸을 꽁꽁 붙들어매서 꼭 소원성취하셔야 합니다 어쩌구 넙죽대면서".
"그래서? 언니는 지 변호사한테 어떻게 대들었어, 애 낳아 주겠다고 그랬어?"
"자기가 그렇게 짓조른다고 덜렁 임신이나 해버리면 내가 무슨 애 낳는 기계 같잖아. 내년까지는 절대로 안된다고, 곤란하다고 딱 잘라 말해줬어.
그러니까 자기도 대번에 열을 받는지, 그러면 당신 소원은 도대체 뭐야, 그런 게 있기나 한 여자야 라고 바락바락 대들대. 막상 그렇게 물어니까 내 소원이 뭔지도 모르겠고, 그게 나한테는 없는 것 같아서 나도 한심한 여자도 싶고 썰렁해지대. 그래서 내 지병인 요통이나 깜쪽같이 없어지는 게 소원이라고 했더니 지 서방이 대뜸, 사모님, 큰 소원 가지셨습니다, 제발 그 소원일랑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어쩌구 씨부렁거리며 혀를 끌끌 차고 말대".
어느 새 두 여자 사이에는 빗자루로 쓸어놓은 듯 맹하고 몽몽한 기운이 한아름 고여들고 있다.
김원우
*작가약력
▲경남 진영 출생 ▲경북대 영문과, 서강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7년 '임지'로 문단 데뷔 ▲한국일보문학상.동인문학상.동서문학상.오영수문학상.대산문학상 수상 ▲대하장편소설 '우국의 바다'(전6권) '짐승의 시간' '일인극 가족' '무기질 청년' '가슴없는 세상' '객수산록' 등 작품 다수 ▲현재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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