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67세 탈북자 "60평생 첫 설이야요"

"처음 맞는 설이라 어케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시요".

지난 27일 오후 7시쯤 어둠이 짙어진 대구 황금주공아파트 앞 좌판시장 골목에서는 주름살이 깊게 팬 부부가 두 손을 꼭 잡고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야채, 생선가게를 두루 거치고 시금치·고등어·갈치 고르는 품이 영락 없는 동네 노인들 모습 그대로.

하지만 이들 최시문(67) 이명옥(67)씨 부부는 예순 일곱 해만에 처음으로 설 장보기에 나선 탈북자들이었다.

7년 전 함북 무산을 출발한 뒤 지난 여름에야 한국에 입국, 이번에 처음 설을 쇠게 된 것.

"이북에서는 양력으로 새해를 맞으니 설·추석 명절이 따로 없어요. 민족 대이동이니 하는 것도 낯설어요. 설이라는 걸 이번에 처음 맞다보니 가슴이 두근거리긴 하지만 여기 풍습을 알아야 뭘 어떻게 할 지 마음을 정할 수 있을텐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

최씨는 "늙은이가 풍습에 적응하려니 헷갈리는 것이 많다"고 했다.

평소에도 가끔 동네에 나가 지난 대통령 선거 얘기도 꺼내보고 남쪽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자식들 얘기도 건네 본다고 했다.

낯선 사회에 뿌리 내리려는 노력들.

그러나 남들 따라 설을 쇠겠노라고 시장거리를 다니다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북에 두고온 식구들 생각이 자꾸 난다고 했다.

"설엔 멀리 헤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두 모인다는데 우리 식구는 다 모일 수가 없시요. 맛 있는 음식도 나눠 먹고 알콩달콩 사는 얘기도 나눴으면 하는데 이제 그런 날은 죽어도 없을 것 아니요?" 아내 이씨의 눈에는 금방 이슬이 맺혔다.

4남매를 뒀지만 2남매만 함께 탈북했다는 것. "두고 온 아이들 생각만 하면 목이 메디요". 아무리 미워도 고향은 고향인 모양이라는 얘기도 했다.

"남쪽에서 처음 맞았던 지난 추석 때 장만한 한복을 옷장에 고이 넣어 두고 이번 설날을 기다려 왔어요. 설 의미는 아직 잘 모르지만 부부가 한복을 차려 입고 자식들 인사를 받고 세뱃돈도 줄 것을 생각하니 그래도 가슴이 설레요. 이렇게 몇 해 보내며 소원을 빌다보면 혹시 통일이 되지 않을까 기다릴 거요".

노부부는 밤마다 한복을 쓰다듬으며 북녘 자식들 만날 날이 오길 기원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설에 또 하나 덧붙이는 새해 소망은 남쪽에서 손주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문현구기자 brand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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