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자주란 말은 매우 삽상하게 들린다.
그러나 늘상 듣기 좋은 말만은 아니다.
때로는 역겹기도 하고 시대착오적인 말처럼 들리기조차 한다.
아직도 민족인가 라고~.
근래들어 우리주변에서 자주외교란 말을 더러 듣게 된다.
미국을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 같다.
미국에 누질리어 외교에서 우리는 주눅이 들고 있지나 않나 하는 일종의 굴욕감이 그 말에는 스며있는 듯도 하다.
(우리는 왜이리 자신이 없을까?) 그렇다면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국제외교사에서 감상론으로 성과를 거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민족자주란 말은 자칫 감상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아니 이미 감상을 속에 배고 나타난 말인 듯이도 보인다.
감상이란 매우 주관적인 심리현상이다.
객관성을 잃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사태는 그래서는 안되게 돼 있는데 내 주관이 거기에 따라가지(부합되지) 못 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미국과 미국의 입장을 무시하고는 크게 국가적 손실을 보게끔 돼 있다.
이 상태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안보와 경제 양면에서 미국이 손을 뗀다고 한다면(만약 그런다고 한다면) 우리는 당장에 곤경에 빠지게끔 돼 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재의 처지다.
자주외교를 입에 담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 우리가 외교권을 남에게 빼앗기고 있는가 말이다.
을사보호조약 그때와 같은 처지에 우리가 놓여져 있는가 말이다.
우리는 지금 당당히 우리의 외교권을 손아귀에 쥐고있지 않은가?
외교란 철두철미 계산일 것이다.
냉철한 계산일 것이다.
아주 드라이한 싸움판이다.
감정, 특히 감상은 금물이다.
치밀한 계산 끝에 국가이익에 도움된다면 서슴없이 민족을 팔아 덕을 보겠다는 음흉한 계산으로 우리 쪽의 감상을 부추기는 세력이 한쪽에 엄연히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째야 할까? 그런 세력(민족을 파는)이 우리의 어느 한쪽에서 냉철한 눈으로 우리를 예의주시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들은 계산하고 있다.
우리가 그 계산의 밥이 될 수는 없다.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을 생각해보자. 그는 척화론을 반대하고 주화론을 폈다.
최명길인들 끝내 싸워서 옥쇄(玉碎) 한다는 것이 얼마나 명예롭고 삽상한 기상인가를 모르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잖은가? 싸워서 죽는 이는 자기가 자진해서 그랬다고 하겠으나 무고한 백성들은 누가 돌봐주나? 납득할만한 조건을 제시하고 항복하는 것이 비굴한 듯하지만 더 용기가 필요하고 국익을 위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최명길이 그나마 나라를 그 지경에서 구해냈다고 할 수는 없을까? 치자(治者)는 언제나 말을 아껴야 하고 늘 계산해야 한다.
얼른 듣기에 삽상하다고 발설을 거침없이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솔직함이 반드시 미덕일 수 만은 없다.
일을 그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말은 듣기에 삽상하기는 하나 중학생이 어깨를 재고 있는 듯이 보일 때가 있다.
치자(治者), 남을 다스리는 사람은 절대 미숙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한다.
언제나 어디서나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신뢰를 얻게 된다.
신뢰, 그것이 그의 보배가 아니던가? 마음을 늘 놓아서는 아니되리.
이상 아마추어의 외교관이 주책없이 씨부렁거린 꼴이 되고 말았다.
내친 걸음에 한마디 더 하고 싶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 모랫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의 위 서정시를 읽으면 우리겨레는 아직도 누구나 하나의 감정, 센티멘탈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의 정감세계에서의 내적인 유대의식으로 그쳐야지 정치문제로까지 비약시켜서는 낭패가 된다.
정치는 내적인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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