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비명의 죽음' 승화 '안전사회' 만들자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서울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그리고 대구지하철 참사.... 모두 인재(人災)였다.

몇명이 책임을 떠안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잊혀졌다.

이번 참사도 그렇게 잊혀져 가고 있다.

과연 살아 남은 자에게 맡겨진 짐은 없는 것일까.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짚어야 할 시간이 됐다.

대구시는 서둘러 현장을 덮으려 했고, 수사 당국은 수사를 매듭짓기에 급급하고, 일부 언론도 보도의 종착역을 좇아 허둥대고 있다.

남겨진 것은 사망자·실종자 가족들. 그리고 시민들은 지역 사회에 대한 불신으로 '선장 없는 배'에 몸을 기댄 채 표류하고 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의 몫은 무엇일까.

최은영(32·여)씨는 "희생자들에 대한 산 자의 몫은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숨져 간 이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고, 그것을 거름 삼아 우리의 후세들이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안전 관련 제도의 업그레이드로 죽음을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

전문가들은 이런 참사가 우리만 겪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렇게 대단하다는 미국조차 엄청난 재해를 많이 겪었다는 것. 다만 미국이 그 희생을 사회 발전의 계기로 승화시킨 데 반해 우리는 참사를 되풀이하며 방치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할 일로 사회안전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 재점검을 제시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대구시·경찰·시민단체·학계·연구소·전문가·언론·시민 등이 힘을 합쳐 '방재(防災) 총괄 기구'가 탄생할 기반을 만들자는 것.

대구대 사회학과 홍덕률 교수는 "사고 예방부터 발생, 대응, 수습까지 단계별로 무엇이 잘못됐는지, 법과 제도의 허점은 무엇인지 꼼꼼히 짚은 뒤 재난 유형별로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방재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가족 김모(42)씨는 "지하철공사 기관사나 간부 몇 명을 사법 처리하고 어물쩍 넘어간다면 시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얼른 '송사리'나 '희생양'을 찾아 내 시민들의 눈을 흐린 뒤 문제를 하루빨리 덮겠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것. 그는 같은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재발 방지책을 내놓는 것만이 희생에 답하는 것이라고 했다.

실종자가족대책위 윤석기 위원장도 대책위의 활동 목표로 이것을 제시했다.

단순히 여론에 밀려 인과관계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어서는 안되고 총체적 부실과 관련한 제도 운영자의 책임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어정쩡한 수사와 수습은 결국 참사에 대한 면죄부만 주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대구지하철 참사 직후 일본은 취재기자 50여명과 외무성 직원까지 대구에 파견했다.

오는 16일에는 요코하마 국립대, 고베대, 오사카소방연구소 관계자들이 대응체계 조사를 위해 대구를 다시 찾을 예정이다.

1968년 도쿄 히비야 지하철 선로에 불이 난 뒤 35년간 한 건의 지하철 화재도 발생하지 않았다지만, 일본은 대구 참사 뒤 지하철 객차 내부를 모두 내연재로 교체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지진과 지하철 화재 등에 대한 체계적 '방재 매뉴얼'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관계자가 전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사뭇 여유가 있다.

국내 대형 재난에 대한 사례와 자료 구축 등에만 머무를 뿐 외국 재난 발생 때 조사 요원조차 파견한 적 없다.

행정자치부는 산하에 '국립방재연구소'를 두고 있지만 이번 대구 참사에 대한 어떤 대응지침도 내리지 않았다.

연구소 자체적으로 사고 조사를 벌이는 것이 고작이다.

이 연구소 백민호 연구관은 "비상 상황에 대비한 예방책 수립, 종합 방재시스템 보완, 지하공간 대피기능 보강, 가연성·유독성 설비 교체, 재난 대응 공조체계 확립, 대응 및 수습의 전문성 확보, 국가적 재난 대응 매뉴얼 구축 등이 필요하다"고 정리했다.

희생을 승화시키는 길은 우선 법을 바꾸고 제도를 바꾸는 일로 출발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복잡한 소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건축물 제연설비, 내장재 시공 관련 규정 등을 건축법 대신 소방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 놨다.

서울시립대 이수경 교수(한국화재소방학회장)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소방법을 설비·시공·일반소방법 등으로 정비하고, 안전과 직결된 건축법상 규정은 소방법으로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

제연설비 등은 다른 법의 적용을 받게 돼 소방법상 규제 근거가 미약하며, 일부 소방안전 관련 규정은 지나치게 느슨하고 모호한데다 다른 법체계와 엇물려 있는 등 법적인 맹점도 이번 참사를 통해 드러났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엔 사람이다.

시민들 모두도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

수십년 동안 우리를 지배해 온 성과 제일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국가의 제1 임무는 시민들을 안전하게 하는 것임을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는 명제로 자리 잡게 해야한다.

잘 사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시민 의식 정립도 마찬가지이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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