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의좋은 4형제가 있었다.
맏형(23)은 연극을 했다.
둘째(17)는 형을 위해 동네(중구 대봉동) 공터에서 무대 세트를 만들었고, 셋째(13)는 통금이 풀리는 새벽 4시부터 포스터를 붙였다.
넷째(10)는 배우들의 심부름을 도맡아했다.
연극이 끝나면 사이좋게 손을 잡고 연극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향했다.
36년 뒤. 맏형은 극단의 대표가 됐고, 둘째는 농원을 경영하고, 셋째는 장관이 됐고, 넷째는 영화사를 차렸다.
이필동(59), 기동(53), 창동(49), 준동(46) 형제다.
4형제는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대구에서 연극과 대중문화에서 '일가'를 이뤘다.
필동(경주문화엑스포 행사기획 실장, 원각사대표)씨는 67년 대구에 최초의 동인제 극단인 '인간무대'를 창단하는 등 40여년간 연극 하나만 파고든 외곬수. 기동씨는 90년대 후반까지 공연기획사 이스트기획을 운영했다.
막내 준동씨는 형(창동)의 영화 '오아시스'를 제작했으며, 현재 영화사 나우필름(주)의 대표다.
이 장관은 교사, 소설가를 거쳐 세번째 연출작 '오아시스'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하나같이 '돈 안되는 일'만 했다"고 한 지인은 말했다.
자신의 가치만 고집스럽게 파헤쳐 나간 것이다.
그 뿌리는 맏형의 연극. 이 장관의 경우 8세때부터 필동(당시 고2)씨의 연극을 구경하러 다녔다.
커서는 KG홀(옛 시민회관)에서 배우 대신 대타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연극인들은 "완벽한 대사로, 미리 준비하고 무대에 오른 듯했다"고 회고한다.
형제 중 가장 '끼'가 있는 이는 둘째 기동씨. 필동씨도 "둘째는 '신명 덩어리'다.
지금 농사를 짓고 있는 것도 기동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뜻이다.
4형제의 특징은 반골 기질. "태생적으로 자유롭고, 기존 질서를 거부하며 자신의 세계를 고집스럽게 고수한 사람들" 이라고 주위 사람들은 평한다.
맏형은 2·28 대구 민주운동에 동참했으며, 준동씨는 5공 시절, 전두환대통령을 풍자한 마당극을 공연하는 등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끼니도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는 것이 4형제의 공통된 기억. '좁쌀 두 개도 포개 놓고 못 산다'고 할 정도로 어려웠다.
4형제 중 월급봉투를 받은 이가 신일고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한 이 장관이 처음이었다.
지인들은 "이 장관은 논리적이고 순수하다.
기동씨는 재능이 있고, 준동씨는 '깡다구'가 있다.
이들을 거느리면서 늘 바쁘고, 어깨가 무거웠던 것이 맏형이었다"고 얘기한다.
지금도 네 형제의 우애는 끔찍하다.
명절때 모이면 밤새워 웃고 얘기한다.
"흡사 딸들이 모인 것 같다"고 할 정도다.
20년간 이들 형제와 교류해 온 이균옥(민예총 대구지회장)씨는 "독특한 개성으로 자기 예술 분야를 흔들림없이 지켜온 것이 이들 형제"라며 "이것이 21세기의 미덕으로 강조된다는 점에서 몇 걸음을 앞서 걷던 이들이다"고 말했다.
김중기기자 filmt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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